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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15 in Shang-hai] Shang-Hai 소개

그의 해외발자취/[2007] 상해,항주,소주

by 그라나도 2007. 8. 3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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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소개 ]

정식 명칭은 상하이직할시[]이다. 중국 제1의 대도시이며 행정적으로는 성()과 동격인 중앙정부 직할시()이다. 시역은 시가지부의 10구(), 교외부의 10현()으로 나뉜다.

시가지는 양쯔강 어귀의 남안(), 황푸강[]이 양쯔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고, 시가지 주변의 넓은 땅과 양쯔강 어귀의 하중도()인 충밍섬[]을 시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시가지를 흐르는 또 하나의 주요 하천인 우쑹강[:]이 황푸강에 합류하는 지점을 옛날에 후독[]이라 불렀다.

상하이의 다른 이름 '후[]'는 옛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부근은 장난[] 삼각주 지대로 토지가 비옥하고, 위의 하천 외에 크고 작은 여러 수로가 시역에 종횡으로 뻗어 있다. 기후는 온난하여 연평균기온 15~16℃를 보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mm이다.

상하이는 중국 굴지의 공업도시로, 방직·기계·조선·전기기기·화학·비료·인쇄 등의 공업이 다양하게 영위되고, 또 기술적으로도 전국을 리드하고 있다. 본래 경공업, 특히 방직공업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으나, 근래 중화학 공업이 크게 신장하고 있다. 시가지 교외의 각 현()에서는 쌀 외에 채소·목화·과일 재배 및 양돈·양금()·담수어양식 등이 활발하다.

1968년 10월 난징[]의 창장대교[] 완성에 의해 베이징[]에 직결되는 징후[?] 철도가 열리고, 또 후항철도[?:상하이~항저우] 외에 많은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상하이 국제 공항은 국내 각지와 국내선을 통하는 외에 국제항로가 열려 있고, 황푸강의 상하이항은 근래 내외 선박의 출입이 급증하여 수만톤급 외항선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국 최대의 무역항이자 세계적인 무역항이다.

상하이는 중국의 주요 학술·문화 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하여 푸단[]대학·통지[]대학·화둥[東]사범대학 등 여러 대학과 다수의 연구기관 및 50만 권의 장서가 있는 상하이도서관과 상하이박물관 등이 있다. 인민공원·중산[]공원·훙커우공원·푸싱[] 공원 등이 있고, 명소·고적으로는 징안사[]·룽화사[] 및 루쉰[]의 묘(:훙커우공원), 서광계()의 묘 등이 있다.



[ 역사 ]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9&dir_id=90205&docid=279747) 참고해 약간 수정.

상하이의 역사는 송말부터 찾을 수 있었다.
상하이는 송말()의 1267년에 이미 무역항이 되어, 무역감독관청으로서의 시박사()의 분소()가 설치되었다.


2. 구미열강의 침략기의 상해.
 그러나 양쯔(揚子)강 하구에 자리잡은 상하이(上海)는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이렇게 잠자고 있던 상하이 앞바다에 영국함대가 위용을 드러낸 것은 지난 1842년. 영국함대는 중국측에 요구조건을 내건 채 해안요새를 무참하게 포격, 중국정부를 굴복시켰다. 패배한 중국정부는 치욕의 난징(南京)조약을 맺고 이 도시를 조약항이라는 명목 하에 외국인에게 개방했다.

이로써 상하이는 외국인 상인들이 다스리는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900년대 초반부터 2차대전이 발발한 1940년대 초까지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에 버금가는 세계 3대도시로 대접받았다.

런던이나 뉴욕과 다른 면이 있다면 당시의 상하이는 한마디로 완벽한 자유와 무법천지가 공존하는 마도(魔都)라는 점이었다. 그곳에서는 여러 자본가나 군벌, 갱들이 뒤엉킨 채 적자생존의 정글을 연출했으며 생존경쟁에서 튕겨져 나간 중국인 서민들은 정확히 ‘두 손으로 움켜쥘 정도의 쌀’을 얻기 위해 하루 온종일의 노동품을 팔아야 했다.
(바람의 검심의 유키히로 에니시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보면, 에니시가 상하이에서 마피아의 두목이 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상하이는 동양의 마도 라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어두운 모습에서, '상하이'라는 칵테일도 탄생했다. 럼을 베이스로 한 약간 쓴 칵테일이다)

이들 서민의 평균수명은 겨우 27세로 13세기 유럽 사회와 비교되곤 했다. 당시 이 곳에서 포교활동을 벌였던 한 종교인은 “하느님이 상하이를 용서한다면 그분은 소돔과 고모라에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당시 상하이의 꽃은 부두를 면한 약 12㎞에 이르는 와이탄(外灘)지역이었다. 이곳은 홍콩상하이은행을 비롯,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 상하이 클럽, 차터은행, 삿슨 하우스, 중국은행, 요코하마쇼킨은행, 자딘매디슨 상회의 화려한 건물들이 줄지은 채 시선을 끌었다.

반면 줄지어선 건물 뒤편의 도심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연출되고 있었다. 경찰은 평균 5시간마다 한번씩 총을 꺼내 발포했으며, 1500곳 이상의 아편굴, 80곳 이상의 아편판매소, 백계 러시아 내지 중국인 여자들이 모여 있는 매춘굴, 도박장 등이 중국 갱들의 기생처로, 그리고 악덕 자본주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번창하고 있었다.

그때의 상하이를 또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자면 요즘 흔히 말하는 국제도시였다는 점이다. 상하이는 크게 프랑스조계, 영국·미국·일본이 관할권을 갖고 있는 공동조계, 그리고 중국인 통치지역으로 3분돼 있었으며, 프랑스조계에는 프랑스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백계러시아인들이 ‘리틀 러시아’ 거리를 형성, 상하이판 러시아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공동조계의 홍구공원을 중심으로는 3만 명의 일본인들이 몰려 있어 ‘리틀 도쿄’로 불렸으며 그 바로 옆에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 나치스 정권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독일계 유대인 1만8000명과 폴란드계 유대인 4000명이 ‘리틀 빈’을 이룬 채 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들 유럽계 유대인보다 먼저 상하이에 자리잡은 이라크계 유대인 가문들의 존재였다. 상하이의 유명한 자본가 계급 가운데는 거드리, 삿슨, 할둔, 에즈라 일족의 4대 유대계 재벌이 있었는데 모두 아편 장사로 돈을 벌어 나중에 차(茶), 비단 및 부동산 사업을 일으켜 대표적인 상하이 귀족 가문을 이뤘다.

이 같은 상하이가 갑자기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진 것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8년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하지만 그로부터 50여년후인 지금, 중국이 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되자 상하이에 유대 상인들이 다시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상하이는 지금 그 옛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의 국제도시, 그리고 세계화의 첨병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세계 500대 기업중 절반 이상이 진출해 있으며 세계적인 금융기관만도 그 숫자가 200여개에 달한다. 그 옛날 중국관리들이 몰수한 아편을 태워버리기 위해 배를 타고 건넜던 버려진 땅, 푸둥(浦東) 지역은 놀랍게도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기업들이 밀집한 첨단 도시로 변신하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역사]
 상하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에서 1919년 4월 13일에 조직되어 1932년 5월에 일본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로 옮기기까지 활약했던 곳이다. 또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이곳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을 폭사·부상케 한 곳으로, 윤봉길 의사 의거 유적지와 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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