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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서울] 구한 말의 요람, 운현궁(雲峴宮)

그의 한국발자취/서울,경기

by 그라나도 2012. 9. 2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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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이라고 하면 흔히 이야기하는 '5대 고궁'이 있다.

법궁인 경복궁, 주로 대부분의 왕들이 살았던 창덕궁, 창경궁, 구한 말의 역사와 함께한 덕수궁(경운궁), 현재 궁들 중 유일하게 개방이 되있으면서 복원이 되지 않은 경희궁.

그런데 궁이 하나가 더 있다. 운현'궁'이라고. 궁이라고? 궁이란 모름지기 왕이 사는 곳인데 왕이 살지 않는 곳인데 궁이라고?

왜냐하면 여기는 왕이 아니었던 왕의 아버지, 대원군. 그러니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운현궁(雲峴宮)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 광무제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으로,

고종이 어릴 때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궁의 명칭이 하사된 곳이다. 흥선대원군은 이 곳을 중심으로 10년 간 어린 고종의 섭정을 펼쳤었다.

1864년에 운현궁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에 이로당과 영로당을 지었다.


섭정 당시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의 경근문과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을 세웠다고 하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규모나 격식으로 볼 때, 일반 사대부 집의 수준은 절대 아니었으며, 이름에 걸맞게 궁궐 내전에 가깝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뒤, 흥선대원군의 첫째 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을 거쳐 손자 이준용에게 상속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상당 규모가 팔렸다고.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의 사랑채. 흥선대원군의 섭정 당시 실질적으로 정사가 이루어졌던 장소라고 한다.

이름의 의미는 늙어 아들이 왕이 되어 편안한 삶을 산다 하여 노안당이라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1820~1898)

대원군(大院君)이란, 임금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 다른 왕족을 양자로 입적하여 대통을 잇게 한 경우,

그 왕족의 실제 아버지에게 부여되는 칭호이다. 흥선대원군 이외에도 대원군의 칭호를 받은 사람은 셋이 더 있으나,

살아서 대원군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며, 역사적 무게감 때문에 흔히 그냥 '대원군'이라고 불린다.


순조, 헌종, 철종 3왕 60년 동안 외척 가문의 세도 정치가 횡횡하며 조선은 망조를 보였다.

이런 외척 가문의 기세등등함 속에 많은 종친들은 죽어 나갔고 흥선군 이하응은 이에 건달 행세를 하며 그들의 눈을 피해 살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안동 김씨들이 그를 '궁도령' '상갓집 개'라고 부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철종이 승하한 이후, 대통을 이을 후사를 찾던 중,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접선하여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을 다음 대통을 잇게 하자고 했으며,

안동 김씨들은 흥선군을 얕보고 그를 왕위를 잇게 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맡아 세도 정치로 얼룩진 조선 정계를 새롭게 개혁해 나갔다.

서원 철폐, 비변사 폐지와 삼군부,의정부 부활, 법전편찬 등의 개혁은 피폐해져 가는 조선을 다시 살리는 길을 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을 위한 무리한 원납전 징수 등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굉장한 국수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 프랑스의 개화 요청에 거부하고 척화를 내세우며 그들과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있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그는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막은 인물 중 한 명으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상황상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이런 드라마같은 그의 삶 때문일까,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는 그에 대해 다루고 있다.

김동인 작가의 <운현궁의 봄>이 그러하고, 가깝게는 이전에 내가 읽은 적 있는 판타지소설인 <한제국건국사> 라든지,

최근 방영한 드라마 <닥터진>이나 웹툰 <한섬세대> 등에서 그려지고 있다. 


대부분의 문학 작품에서 그려지는 흥선대원군은 국수주의자라는 평가보다는, 시대의 부름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을 하였고,

조선을 위해 힘써 일하는 영웅적인 측면이 굉장히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관련글보기]

2009/05/10 - [그의 책이야기] - 흥선대원군은 쇄국주의자가 아니다. <한제국건국사>





고종이 왕으로 정해졌다는 교서를 받는 의식인 봉사식의 재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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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락당(老樂堂)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한 건물




운현궁 관리 측에 참 안타까운 부분인데,

을미사변으로 희생당한 민비는 명성'황'후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민비에게 황후의 시호를 내렸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Queen이 아니라 Empress가 되어야겠지.

이름이 겹치는 사람이 없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조선 제 18대 임금인 현종의 정비의 시호가 명성'왕'후이기 때문에

정확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이로당(二老堂)

노락당과 더불어 운현궁의 안채 역할을 하는 곳으로,

금남의 구역이었으며, 이로당의 안주인이 운현궁 전체 살림의 책임자였다고.




궁이라고는 하지만 화려하게 채색되지 않고 나무 본연의 색만 가지고 있는 운현궁의 모습은

검소한 사대부의 모습과 왕족의 모습이 동시에 보여지는 것만 같다.




운현궁의 세 건물을 관람하고 마당으로 나오면 있는 유물전시관.

운현궁에 관련된 여러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도 정치로 인해 무너져 가던 조선에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그 이후 개화와 함께 정신없이 펼쳐지던 역사의 시대. 그 역사의 시대가 드러나는 곳은 아니지만

그 역사, 구한 말이라 불리우던 그 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의 섭정.

그리고 그것의 장소였던 바로 이 운현궁이 구한 말이라는 시대가 시작된 장소가 아닐까





Canon - Ixus 310 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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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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