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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서울] 삶의 터전이자 이제는 국제도시 서울의 상징, 청계천

그의 한국발자취/서울,경기

by 그라나도 2012. 9. 2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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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청계천의 시작은 광화문 근처이지만, 동대문을 구경한 뒤, 청계천으로 왔다.

1호선 지하철 역인 동대문 역에서 내려 두타로 가는 길에 청계천을 건너기 때문이다.

동대문 구경을 마치고 바로 청계천 길로 내려갔다.




청계천(靑溪川)

작게 봤을 때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북악산, 남산에서 흘러나온 물들이 모이는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이 많지 않은 건천이지만, 홍수가 나면 익사사고, 집이 떠내려가는 사고에 생활 오수 및 빈민촌의 문제로 골치였다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는 뭐 그랬을테고, 수많은 일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많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그려지는 1930년대 청계천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사진이나,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있었던 거지촌으로 그려지는 곳이 청계천 강가이고 하니 말이다.


그런 청계천은 1958년부터 1977년까지 복개 공사를 하여 고가도로를 설치했었는데,

현재 대통령인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당시 청계천 복원 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약간 녹조가 있어뵈기는 하지만 많은 어류들이 돌아다니고 있기도 하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청계천 복구 뒤에 도시열이 그 전에 비해 비교적 잘 냉각되어 친환경적이기도 했다고 한다.




시청 방향으로 쭉가다가 벽면에서 발견한 벽화들.

어렴풋이 조선시대 무슨 행차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엇일까? 하면서 보며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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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이산의 능행 반차도였다.




1795년 2월, 정조는 사도세자의 회감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과 현륭원을 다녀와

그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편찬했다. 여기엔 왕이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1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따르고 있다고 한다. 이 반차도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와 여러 일류 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졌다 한다.




그래도 하천을 따라 걷는 것이다 보니 그 바람 때문에 기분 좋게 쭉 걸어와

청계천이 시작하는 지점까지 도달했다.





정수된 물이 방류되는 청계천의 시작점

밤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떨어지는 그 물이 더욱 더 예쁘게 보이기도 한다.




붉은 악마 티에도 그려져 있는 치우천왕을 양각한 돌




'스프링'이란 이름의 작품으로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반 브루군의 공동작품.

도시에 재생된 자연의 기념물로 청계천 복원 프로젝트의 상징이라 한다.


서울이 수도이던 때 서울의 서민들의 생활 현장이기도 하면서, 복개 이후 서울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자

이제는 쉼터의 역할을 하며, 유네스코 지정 창의도시인 서울의 상징이 되어 외국에 그 이름을 알리고 있는 곳.

그런 곳이 청계천이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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