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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영주] 선비다움에 대하여. 소수서원

그의 한국발자취/대구,경북

by 그라나도 2012. 9. 4.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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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어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오전엔 화창했던 날이 저녁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전에 소수서원을 얼른 둘러보고 시내에 숙소를 잡아 쉬러 가보아야했기에 부석사에서 소수서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빨리했다.


영주를 가리켜 지자체 관계자들은 누누히 '선비의 고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자 한다.

사실 전통 양반들의 고향은 안동이나 여러 양반 집성촌을 떠올리기도 하고, 과거 성리학의 중심은 어느 한 지역이라 하기보다는

학파별로 주도 지역이 달랐는데 왜 영주가 이 수식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소수서원 때문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원래 백운동 서원이라 하여 1541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 지역 유학자인 안향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알려 유학을 융성하게 하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을 요청하고 국가에 지원을 부탁했다. 이에 명종은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 현판을 받게 되었고,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경자 바위가 있는 곳

원래 이 곳의 소는 별다른 이름없이 백운동 소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서원의 옛 자리에는 신라시대부터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을 주세붕이 헐고 서원을 지으며 

사내에 있던 모든 불상을 이 소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불상들을 버린 행위에 하늘이 노했는지, 불상들의 한이 서린 것인지 밤이 되면 

소에서 뛰어내리는 소리가 첨벙첨벙 나는 것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두려움에 떨며 학업에 몰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들은 주세붕 선생이 경 자를 새기자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경 자를 쓴 것이 공경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불상이 한을 풀었다는 설과 

주자의 철학 근본이 경에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경건한 마음을 잃지 말라는 의미에서 새겼다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의 서원이 한 본 목적의 기능은 교육과 선현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 둘 중 교육의 목적, 즉 강학을 담당한 곳은 첫 사진의 강학당과 아래 나오는 지락재와 학구재 영역이다.

서원의 건물 배치역시 학문에 대한 뜻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본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강학당 주위의 건물들이

학업에 대한 자세를 기준으로 차례대로 배치되어 있고 그 마지막에 이 명륜당이 되는 강학당에 들어 이치를 밝힌다는 뜻을 담는다고.





영정각(影禎閣)

고등학교 국사를 한 인문계열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알 법한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서원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 제향.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으로 건립할 당시 안향을,  이후 안축과 안보를 추가 배향한 사원이기 때문에 그의 영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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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서원의 사료들과 이전 선비들의 공부하는 미니어쳐를 만들어 놓았다.

서원은 또 중앙에서 관직을 하지 않는 산림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서원을 중심으로 유학의 파가 나뉘어지게 되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 성리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갈라지게 된 학풍은 나중에 조선 후기를 좌지우지한 붕당으로 나아갔는데,

각 붕당들의 기반이 되는 각 서원들도 지역별로 그 성향을 드러내고 자기네 사람들만 서원에 받게 되었다.


초기에 긍정적 유학의 발전을 위해 시작된 서원들이 붕당의 본거지가 되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시작해 모든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결국 흥선대원군에 이르러 47개 서원만 남기고 없애게 된 것.


선비들이 있었던 서원에 이르러 선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선비다움이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선비 정신'이라고 하여 일본의 '무사도'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지도 계급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 쓰인다.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해서 올곧은 소리를 낼 줄알고 자신의 몸보다는 국가를 아끼는 그런 자세?

하지만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 과연 그런 선비다움을 행한 선비가 몇이나 될까 싶다.

종묘사직의 보존이라는 명분과 함께 자신이 기득권을 잃지 않게, 목숨을 위해서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도망하고

병자호란에서도 그러고. 지도 계급이란 사람들이 국민을 위해 싸우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고 그저 붓만 굴리며 명분이나 만들어 도망가고나 있었는데

그게 선비라는 자들이 할 짓일까?




물론 유학이란 우리의 삶을 보는 철학의 하나이고, 사람에 대한 학문은 나아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런 물 마시고, 그냥 서원에 앉아서 책만 읽고, 학문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그 내용으로 말장난해서 의무는 망각하고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것은

지도 계층이 할 짓은 아니다. 만약 그 시절의 진정한 선비였다면, 도망가기보다는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서 칼을 뽑아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옳았을 것.

문과 무가 다 필요했다는 것.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로 선비정신을 이야기한다.

나라면 우리네의 정치인들에게 문과 무가 필요하다는 말을 바꿔서 하자면,

좋은 대학가서 많은 공부를 해서 그 공부한 것으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말장난이나 하며 명분을 만들게 아니라

배운 것(문)을 실천할 수 있는 추진력(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선비다움이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은 붙어있다.

선비촌은 일종의 테마파크라고 할 수 있는데, 따로 입장료를 내야했다.

딱히 특별히 뭐가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고 비도 추적추적오고 해서 발길을 돌렸다.




선비촌 쪽으로 나와 소수서원 입구로 다시 돌아가는 길엔 금성대군 신단이 있었다.




공사중이라 되어 있었지만 안에 막는 사람은 없어 슬쩍 들어갔다 나왔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 1426-1457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모반 혐의로 유배되어 있던 순흥에서

순흥부사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단종복위를 꾀하려고 하였으나 관노가 이것을 일러바쳐 사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왕권-신권의 경계에서 당시에는 왕권이 강화가 필요했고

그를 위해 세조라는 인물이 필요했음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하된 사람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종묘사직에 대한 충성을 바치려 했던 금성대군의 의지 역시 높이살 수 있다.

그 역시 선비다움을 갖추었던 사람 중 한 명이지 않았을까?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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