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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영주]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한 천년고찰, 부석사

그의 한국발자취/대구,경북

by 그라나도 2012. 9. 3.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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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장마전선이 걸쳐 있을 때라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듣기는 했지만,

낮에는 웬만해선 보기 힘들 정도로 날이 화창하더니, 금새 오후가 되자 시커매지는 것이 꽤나 신기했다.

사진이 잘 안나오지는 않을까 초조하기도 하고, 하루 만에 날씨가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간에 확실한 것은 죽령 고개를 넘어 단양에서 경상북도 영주로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부석사에도 도착했고 말이다.




영주라는 도시는 서쪽에 소백산 지역이, 동쪽에는 태백산 지역이 있는 두 백산이 만나는 고장이라고 한다.

권역상 이 주변이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다 보니 소백산에 속한 절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태백산에 속하는 절이라고 한다. 따로 부석사 관계자가 세워놓은 팻말에도 그렇게 나와있고, 

이렇게 일주문에도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아직은 무르익지 않은 풋사과를 팔고 계신 아주머니

잘은 알지 못했는데,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 중에 영주에서 온 친구가 있다.

유난히 영주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치는 친구인데 우연히 본 영주사과 광고를 그 친구에게 보여주니깐

웬만한 사과즙을 먹어보았다면 대개는 영주사과로 만든 것일 거라고.....

영주의 특산물인 사과. 뭐 사지는 않았지만 부석사 권내에서 팔고 계신 분을 보니 괜히 생각이 나서 셔터를 누르게 되었다.




부석사 안.

많은 절들이 절 안에 보면 대웅전을 기점으로 여러 건물과 함께 텅 빈 공터의 공간으로 이루어져있기 마련인데,

부석사는 안에 다양한 조형물이 있는 것이 꽤나 눈길을 끄는 부분이었다.


부석사(浮石寺)

신라 문무왕 때인 676년 의상조사에 의해서 창건된 절.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절인만큼 본전인 무량수전, 석등, 조사당, 소조여래좌상, 조사당 벽화 등 국보급 문화재로 즐비한 절이다.

나는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부석사를 왔던 적이 있다. 그 때 드라마 <태조왕건>이 꽤나 유행이었는데, 태조왕건의 한 장면에 보면

궁예가 부석사에 방문하여 아버지(로 알려진) 신라 제 48대 경문왕의 초상을 보고 칼로 찌르는데, 그 초상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 때문인지 부석사라는 장소에 대해 워낙 각인이 되어 있었고 가족 여행을 하던 차에 이 지역에서 부석사에 왔다는 것이 확실히 기억나는 것.




부석사 삼층석탑

과연 천 년 고찰답게 오래 전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중기단 위에 삼 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형태를 띄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찰들이 억불사상의 조선시대를 지나며 산에 사찰을 많이 지었는데

부석사에서는 그런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계단식으로 차례차례 건물이 있는 부석사의 뒤에는 산이 있다.

그리고 부석사 경내가 삭막하기 보다는 꽃과 풀, 나무로 가꾸어 놓아서 보다 더 주변 경치와 잘 어우러지는 매력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 17호로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석등

사람보다 큰 것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석등의 높이는 2.97m라고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부석사의 본건물인 무량수전. 부석사의 얼굴과도 같으며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전해진다.

고려 우왕 때인 1376년 중창되었다 전해지는데 건축양식 및 기법으로 보아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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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아버린 무량수전 현판을 보면서 이 건물이 얼마나 만고의 세월을 지나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전에는 베스트셀러 때문에 알고 있던 무량수전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는 국사 과목을 공부하며 또 무량수전에 대해 알고 있게 되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이후 유행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학이나 미학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고려시대에 언급되는 건축 양식으로는

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이있다. 주심포양식은 주두(柱頭)에만 두공을 두고 기둥 사이에는 간두속을 두는 것을 말한다. 

다포양식은 주두(柱頭)와 기둥 사이에 두공을 두어 외관이 복잡하게 만든 것인데 그래서 주심포 양식에 비하여 비교적 더욱 더 화려해보인다.




내가 초등학교 때 부석사를 방문했을 때 TV에서 꽤나 인기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은 MBC에서 방영한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였다.

당시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책 중 하나가 바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다.

이 책의 발간 이후 이 책에서 언급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대하여 굉장히 관심이 높아졌는데,

당시 어릴 때는 그것을 딱히 신경을 써서 보지 못하다가 이제 성인이 되서야 무량수전을 보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배흘림 기둥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 본 관내의 모습.

관내의 호젓한 분위기와 주변의 푸른 산세가 어우러져 조용한 한국 사찰의 매력을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조용하고 호젓한 절에서 템플 스테이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뭐, 나는 천주교인이지만 말이다.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조사당이란 선종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종파의 조사나 사찰의 건립자를 기리기 위한 건물 중 하나이다.

부석사의 조사당은 국보 제 19호로, 부석사의 창건자인 의상대사를 기리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무량수전과 더불어 고려 우왕 때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무량수전과 더불어 고려시대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건물




조사당 벽화

조사당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으로 알려진 국보 제 46호 조사당 벽화가 있다.




조사당 선비화

택리지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뒤, 서역 천축국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것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의상대사 역시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나무를 조선 광해군 때 경상감사 정조라는 자가 자신의 지팡이로 만들겠다고 잘라갔다고 하는데 다시 줄기가 뻗어 나무는 자라났고

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이 나무를 보고 부석사선비화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아기를 못낳는 부인들이 이 선비화의 잎을 따 차를 끓여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나뭇잎을 많이 따가다보니 나무 훼손이 심해

현재는 저렇게 철책으로 둘러 놓았다고 한다.




조사당과 나한전, 자인당 등을 구경하고 내려와 바라 본 부석사 경내.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한 역사를 지닌 천년고찰.

또한 산속에서 조용히 스스로를 수련하는 승려의 모습과도 닮아 있어

우리 불교가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사찰이 아닌가 생각한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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