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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1/집안] 대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환도산성(丸都山城)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8. 2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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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시내에서는 조금 떨어져가면은 환도산에 있는 환도산성터를 찾아갈 수가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

환도성의 그 자체 이름보다는 아마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삼국사기]에서 제 2대 유리명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 위나암성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국내성에서 그렇게 먼 거리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국내성과 하나의 생활권역, 요컨대 수도의 역할을 한 지역으로

평상시 행정/군사의 중심지가 국내성이라면 전시상황의 중심지가 바로 이 환도산성인 것이다.


사서들의 내용에 보면 환도성으로 천도했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수도를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그리고 국내성으로 다시 왔다가

평양성으로 옮긴 것이라 수도가 졸본,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정확하게 보자면 환도산성은 국내성 권역에 포함됨으로

국내성 시대의 범주 속에 역시 들어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환도산성은 이름처럼 산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북쪽으로는 산이 둘러쌓여 있고

남쪽으로 만 뚫려있는 형태인데 그곳에는 성곽을 쌓은 흔적이 있다.



거의 유적은 없고 농민들의 밭으로 사용된다.

그 현실을 대변하듯, 소 한마리가 앉아 우리를 쳐다보았다.




망루로 사용되었다고 추측되는 곳.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 유일하게 뚫린 곳이기 때문에 그 곳의 방어를 중점적으로 했을 것이다.




왕궁터라고 전해지는 곳.

비상시 왕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환도산성은 동서와 북을 산이 둘러싸고 있고 남쪽만 뚫려있다고 하였다.

성을 둘러 있는 산의 높이가 높을 뿐 아니라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보니 남문 한 곳만 제대로 지키면 난공불락인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대 대규모로 침략 받았던 때를 살펴보고 싶다.


고려 때 몽고의 침입을 받았을 때,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일본의 침략을 받고 양 호란으로 인해 청에 침략을 받았을 때,

정확히 말하면 싸우기보다 정부는 피했다.

고려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피난가서 40년 동안 국토가 유린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향락을 즐겼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맞서기 보다는 의주를 넘어 명나라로 도망갔었다. 병자호란 때 역시 강화도로 도망가려다 실패하고 남한산성에 있다가

결국 항복하게 되었었다. 어떻게 보면, 지배층이 흔히 이야기하는 지배계층의 의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나라를 위해 맞서기보다는 일신의 안위를 추구하는 모습.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들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중국과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아왔다. 특히 중국의 침입은 고구려에게 큰 위험이 되기도 했었다.


제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 무휼의 시대에 신나라의 대군이 쳐 들어왔었으나, 이 환도산성으로 들어와 끊임없이 농성하며 전쟁을 전개했었다. (을두지의 잉어 고사로 유명하다.) 제 8대 신대왕(新大王) 백고 시대에는 통일 중국의 국가였던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었으나, 피하기 보다는 국상 명림답부는 '좌원대첩'을 통해 그들을 물리쳤었고, 제 12대 동천왕(東川王) 교체 시대에는 위나라 관구검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여 결국 그 군대가 돌아가게 하였다.


도망가기 보다는 보다 맞서 싸우는 모습.

그런 호방한 기질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책임 의식을 펼쳤던 장소가 바로 천혜의 요새, 위나암성인 것이다.




어떤 의미로 내가 보기에는 위나암성은 안쪽의 산세 외에도 바깥의 산세가 한 번 더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바깥산세와 안쪽 산세와의 사이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있다.




이 곳에 있는 무덤들은 대부분이 적석총의 형태를 띄는데, 이를 통해 이 곳이 마치 이집트 왕가의 계곡처럼

고구려 귀족들의 무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귀족묘를 안전하지 않은데 지었을리는 없을 터, 내 생각에는 안쪽 산세가 내성(內城), 

바깥쪽 산세가 외성(外城)의 역할을 하여 보다 더 큰 규모의 산성형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곳에 적석총이 굉장히 밀집해있기는 하나,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경주처럼

집안 시내 전체가 하나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집안 시내의 고분군 지도를 보면 전방위적으로 곳곳에 고분군이 흩어져있다.

약 1만 기 이상이 집안시내 시외 곳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니 가히 대제국 고구려에 대해 알 수 있지 않나 싶다.




천혜의 요새.

그리고 그 곳에서 이민족의 침입에 도망치기보다 맞서 싸온 우리 선조 고구려인들의 모습.

이것이 후대의 우리 민족의 지배층에게 결여되어 있던 부분이기도 하며, 현재 우리나라의 지도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한 것과 대비된다.

이런 책임의식이 고구려를 동북아 최강의 대제국으로 만들어주는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지도자들에게도 이런 책임 의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Canon - Ixus 310 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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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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