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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1/집안] 한민족 역사의 최전성기를 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8. 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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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과 광개토대왕릉비는 그다지 먼 곳에 있지 않다.

대절한 택시를 타고 금방 광개토대왕릉비로 이동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을 호태왕(好太王)이라고 말한다.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국강상에 뭍혔으며(나라를 강력하게 했으며 라고해석하기도 한다)

 나라의 땅을 크게 넓히고 편안하게 하신 태왕'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태왕을 아름답게 부르기 위해 호태왕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호태왕 역시 맞는 표현이지만,

이 표현을 고집함으로써 '태왕'이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와 대칭되는 동북아 군주의 명칭인 '보통명사'가 아닌

광개토대왕의 고유명사로 만들려고 느끼는 것은 괜한 나의 걱정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방문했을 떄 태왕릉은 들어갈 수가 없게 되있었다.

중국어를 읽지는 못하지만 7월 10일부터 20일까지 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틀 차이로 가까이서 못보다니 아쉬웠다.




멀리서보이는 광개토대왕릉.

장군총과 같이 계단식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적석총의 형태를 띄고 있다.

사진으로는 잘 보여지지 않지만, 거대한 장군총보다도 더 큰 규모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묘로 추정된다.


고구려 제 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담덕


정식시호는 아까 언급했듯,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의 영토를 매우 크게 확장하여 고구려가 동북아 최강국이 된 시기를 열었던 왕.


백제의 근초고왕에게 살해당한 제 16대 고국원왕 이후 고구려는 사면초가에 빠졌었으나,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의 노력으로 어느정도 국력을 수습하고 마침내 서기 391년, 18살의 젊은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여 421년 또한 젊은 나이로 죽기 이전까지 남과 북으로 광대한 영토를 넓힌 왕.


고국원왕 시절부터 고구려가 위태해지게 된 이유에는 중국의 5호16국시대에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와 한반도 서남부와 산둥반도를 중심으로 힘을 발휘하던 백제의 강성함이 이유였다. 연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가져가기도 했으며, 백제는 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살해했었다.


광개토대왕은 이런 연나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즉위 원년부터 끊임없이 공략에 (광개토대왕릉비문 내용에 따르면) 백제 아신왕으로 부터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받았을 뿐더러, 백제와 왜가 합동으로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 내물이사금의 요청에 따라 신라를 도우러 군대를 보내어 한반도 남부에도 힘을 발휘 했다. 


또한 북방의 후연을 끊임없이 공략하여 후연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고구려계 혈통이 북연을 건국하게 되었다. 2009년 연세대학교 지배선 교수는 당시 후연의 도읍이던 연군, 그러니깐 오늘날의 북경을 고구려가 공략했었다고 주장한다. 여러가지를 보았을 떄, 남북조 시대로 들어가기 이전 5호 16국 시대의 최강국 후연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이 고구려이며, 그 곳에 같은 혈통으로 우방국으로 삼은 북연이 건설되게하였다는 것에 명실상부한 동북아 최강대국의 시기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만든 비석이다.

높이가 6.39m에 이르는 것이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첫째 부분(제 1면 1행~6행)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와 고구려왕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광개토 대왕의 행적에 대해 서술해놓았다.

둘째 부분(제 1면 7행~ 3면 8행)까지는 광개토대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과 토경순수가 있는데, 한반도 지역은 전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동일 문화권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년)의 기록에서 왜는 축출의 대상이지 정토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점에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 부분(제 3면 8행 ~ 4면 9행)에는 수묘인 연호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 나와있다. 마지막 부분을 통해 당시 고구려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는 동경성의 발해상경용천부 유적과 유사한데,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정서 고취를 막기 위함이 아닐까?

참으로 분통터지는 일이지만 이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이 곳을 지배하는 중국이 우리에게 관람을 못하게 만드는 등, 불이익을 가할 수 있으니 지키는 것이 되도록 좋다고 생각한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신묘년기사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왔다.


1883년 일본군 중위 시쿠오가 가져온 쌍구가묵본을 바탕으로 

1888년 요코이 다다나오가 회여록이라는 아세아 협회 기관지에 고구려고비고라는 글을 싣는데 여기에서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의 내용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하여,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4세기 신공왕후의 한반도 침략설을 뒷받침한다 하여,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았다.




이에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에 비문 내용 중,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는 '왜'가 아니라 비문을 작성한 고구려이기에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재일사학자 이진희는 1972년 석회도부작전설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한반도 지배와 만주 침략을 위해

비석에 석회를 발라 내용을 왜곡한 것이라고 하였다.


1981년 이형구는 비문의 내용을 재검토하여'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왜곡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것을 바꾸어 해석하면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는 내용이 된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담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담아내는 소중한 유적이지만 우리 마음대로 볼 수도, 사진을 찍을 수도 없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되려고 했다는 것에 치를 떨 수 밖에 없다.


못난 후손들이 조상님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위대하면서도 씁쓸한 유적이었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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