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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심양] 만주족 제국의 잉태, 청 심양고궁(下)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7. 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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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서쪽 길을 통해 서로로 갈 수 있다. 

서로는 청이 북경 천도 이후 지어진 지역으로 

이후 황제들이 동북 지방을 순시하거나 선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그런만큼 중국 형식이 더욱 더 강하며, 동로나 서로에 비해

웅장함보다는 소박함이 눈에 띈다.




황제가 심양에 머무를 때 군을 통제하던 곳이었다는 적광전(迪光殿)





황제가 심양에 왔을 때의 침실이라는 보극궁(保極宮)






황제가 심양을 방문했을 때, 후궁이 살던 계사재(繼思齋)






문소각(文溯阁)

건륭제 때 지어졌으며,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보관하던 일곱 곳 중 한 곳으로 도서관이다.

대부분의 건물이 황색과 붉은색으로 채색되어있지만 문소각은 방화도료로 인해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문소각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만주어와 한자로 기록된 비정(碑亭)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석판본

사고전서(四庫全書)라는 명칭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4부(部)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고대로부터 당대(當代)까지의 모든 서적을 망라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의 한족 지배의 회유책으로 적극적인 문화정책이 이루어졌는데 그 일환으로 건륭제 시절에 간행된 것이 바로 이 사고전서. 총 일곱 벌을 만들었다 하는데, 4벌은 황궁에, 3벌은 민간에 열람시키는 등 총 7벌을 만들었다 한다.




<청 심양고궁 글의 끝을 맺으며>

동북 만주족이 세운 대제국 청의 고궁을 본다고 생각했기에,

매우 웅장한 규모를 기대했었다. 서울에서 경복궁을 보고 왔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했던 그런 웅장한 규모는 아니었다.


북방민족 특유의 소박함 때문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완벽한 대제국을 보았다기 보다는, 대제국이 잉태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난 큰 의미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중국에게 우리가 침략 받은 것이 아니라,

동북 유목 민족 혈통 간의 내전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처럼 합병했어도 됬을 조선을 왜 합병하지 않고 형과 아우의 국가로 한 것이었을까?

조선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기존에 여러 동북 민족 혈통의 주류였고,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무릎 꿇게 했다는 것은 조선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같은 혈통의 민족으로 보고,

이를 무릎 꿇힘으로써 당시 동북 정세에서 조선이 아니라 만주족이 동북 민족 혈통의 주류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후금(청)과 조선의 싸움은 중국에게 우리가  머리 숙이게 된 것이 아닌, 동북 민족 간에 주류가 누구인지를 두고 싸운 내전.

그게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를 안겨 준 청이지만, 한편으론 우리와 멀지 않은 핏줄로

대제국을 건설해 세계를 호령했던 청의 잉태지, 심양고궁.

그것이 이번 방문에서 내가 느낀 것이었다.



[심양고궁 다른 글 보기]


2012/07/16 - [Abroad/[2012] 만주] - [2012.07.05/심양] 만주족 제국의 잉태, 청 심양고궁(上)

2012/07/16 - [Abroad/[2012] 만주] - [2012.07.05/심양] 만주족 제국의 잉태, 청 심양고궁(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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