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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5/심양] 혼란스러운 근대시기를 보여주는. 장씨수부(張氏帥府)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7. 1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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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고궁에서 나와 그 근처에 있는 장씨수부(張氏帥府)로 갔다.

장씨수부는 1920-30년대 동북 3성의 군벌이었던 장작림(장쭤린)과 그의 아들인 장학량(장쉐량)의 관저였던 곳이다.

흔히들 장씨사부(張氏師府)라고 하던데, 입장권이나 입구에도 모두 장씨수부(張氏帥府)로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장씨수부가 옳은 명칭인 것 같다.



사진의 동상은 장학량의 모습이다.


북방 봉천 군벌의 수장이었던 장작림은 친일파로 일본과 협력하였는데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장작림이 탄 기차를 폭파시켰다. 이후 아버지를 죽인 일본을 적으로 두게된 장학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게 되었다.


현재 중국에서는 장학량을 매우 높게 사는데, 국공 내전 당시 자신을 장개석(장제스)을 가두어 

국공 합작을 이뤄내 일본과 싸우는 공동전선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타이완에서는 국민당 원수를 가뒀다는 이유로 수십 년 동안 장학량을 가택연금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친일이었던 장작림에 대해 이곳에서 알리는 것보다는 장학량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수화의문(垂花儀門)

목재구조로 이루어진 건물로 장작림이 중요한 손님을 만나거나 해외 사절을 접견할 때 의전에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당시 사용됐던 마차








장씨수부에서는 특별 전시전을 하고 있었는데

세계 각지의 칼에 대하여 전시를 하고 있었다.




장씨수부의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대청루(大靑樓)

로마식 건축물로 1918년에서 1922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높이가 37m에 달하는데 지어질 당시 봉천성(심양의 옛 이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완공 후에 장작림과 장학량 두 부자에 걸쳐 사무실 겸 주거지로 사용되던 곳이다.





쑨원의 초상이 걸려 있고 중화민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아마도 장학량이 국민당에 투신하여 함께 했기 때문에 걸어놓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대만을 인정하지 않는 중국 정부가 저걸 걸게 왜 놔두었을까 간단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내부를 돌아다녀 보면 장씨 가문에 대해, 특히 장학량에 대하여

아주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앞서 말했듯, 현 중국 정부에서는 장학량을 아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평가를 통하여 중국 공산당을 높이고 그를 연금한 중국 국민당을 낮춰 보는 중국의 시각도 엿볼 수 있다.




대청루 2층 난간에서 보이는 장씨수부와 심양 시내의 모습






장씨수부 내의 정원




소청루(小靑樓)

장작림이 1918년 5번째 부인인 수씨를 위해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1층 서쪽으로는 접대실이, 동측으로는 침실이 있다.

2층에서는 장작림의 딸들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일본에 의해 사고를 당한 후, 장작림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소청루의 접대실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소청루 내부.

내부 모습은 그닥 대청루와 다를 바가 없다.

장작림의 초상이 걸려 있다.



과거 만주족이 청의 역사를 시작했던 화려한 도시 심양의 모습과 함께

혼란스러웠던 근대 시기, 봉천 군벌의 중심지였던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 장씨수부

혼란스럽고 모순으로 가득했던 그 시기의 모습을 얼핏이나마 보여주고 있었다.



(구글맵스를 사용했습니다. 저작권 문제시 연락주시면 지우겠습니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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