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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포르노그라피아]

그의 책이야기/동유럽문학

by 그라나도 2011. 8. 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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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10점

3월 25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연고대 합동응원전
"이 노래를 자랑스러운 연세대학교 윤!동!주! 선배님께 바칩니다! 서시, 서시 준비!!"
아카라카 단장님의 구호에 맞춰 응원가 서시를 불렀다.
"죽어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소설 배경은 1943년의 폴란드. 한창 2차 세계대전 중일 때, 나치 독일로부터 가장 핍박을 받고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들)이라 말할 수 있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적 캐릭터와 프레데릭, 그들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지식인에 속했다. 우리가 항상 지식인을 떠올린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대의 깨어있는 양심. 옳지 않은 것에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응당 떠올린다. 하지만 지식인으로 그려지는 비톨드와 프레데릭은 소설에서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바르샤바를 떠나 시골로 내려와 젊은 남녀를 희롱하고 노는 등, 현실에 대한 지식인의 의무와는 거리가 있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도 많은 지식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현실의 벽에서 친일로 변절하기도 낙향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선배님이라는 윤동주 선배님도 그런 현실의 벽에 멈춰서신 분이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흔히 40년대 저항시인을 이야기하며, 이육사 시인과 윤동주 시인을 말한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은 소극적 저항시인이라고 한다. 그런 모습은 유명한 시이자 우리 학교의 응원가이기도 한 '서시'에 잘 들어난다. 죽어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길!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잘못된 점을 고치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면 비톨드와 프레데릭은 이런 소극적 저항 의식조차 없는 지식인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본다. 저항은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의지를 일종의 대리 만족을 통해 느끼고자 하진 않았을까. 마기 나치에도 소속되어 활동했던 카롤. 나치 독일 하에서 법률가의 길을 걷는 알프레드. 단순히 젊은이들을 보며 희롱하고 싶다는 것으로 그려지기는 소극적으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의식이 아직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맥락은 아닐까? 시에미안을 죽이려 든다는 점에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보이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소설 속 비톨드와 프레데릭, 그리고 윤동주는 사회적 양심을 실천하고는 싶었지만 소극적으로 가지고만 있었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나는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http://granado2.tistory.com2011-08-08T10:53:14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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