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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고마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이별> [2010.01.23-24]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2. 15.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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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치 구경을 마치고, 호치민 시로 들어왔다.
호치민 시에서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가기 전에 호치민 시 내의 재래시장을 가보게 되었다.
모두들 마지막으로 기념품을 사 간다고 재래시장을 이래저래 돌아다녔지만, 난 피곤한 것도 있고 해서,
동생들과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는 HIGHLAND 커피 하우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들어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느낀 것은 없었지만, 느낀 것이라면 또 느낀 게 있었다.
에? 이게 무슨 역설이냐고? 재래시장에서 느낀 아니라, 호치민 시에서 느낀 것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베트남에서는 주로 쓰이는 이동수단이 오토바이이다.
그런만큼, 이런 번잡한 길거리엔 수백,수천대의 오토바이가 나다니는데,
문제는 교통질서체계가 전혀 없어서, 눈치보고 건너야 된다는 것이다.
커피 하우스가 재래시장과는 좀 떨어져 있어서 도로를 몇 번을 건너야 하는데, 오토바이에 부딪힐 뻔 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 지 모르겠다.
캄보디아야 기본적으로 차량/오토바이가 적으니깐 그렇다쳐도, 베트남/중국 같은 곳에는
이미 이런 차량/오토바이가 넘쳐 나는 데, 나라의 좋은 이미지나, 또 인명피해 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신호등 체계라던지 이런 걸 제대로 잡아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트남 제한 속도가 45km라는 것.
아마 그것보다 빠르면 눈치 때려서 건너기도 힘들 것이다. ㅋㅋ
유럽 갔을 때도 느꼈지만, 이래저래 말은 많아도 한국이 참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다.

내가 베트남에 와서 붕따우서 그나마 남은 돈을 다썼었기 때문에,
베트남 돈인 동(Dong)을 가지고 있지를 않았다. (커피는 동생이 사줬다. 참 못난 형이다.)
안타깝게도 기념으로 베트남 돈을 들고 오지 못해, 사진은 찍지 못했는 데, 여튼 간에 베트남 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베트남 동은 전 화폐에 호치민의 초상이 찍혀 있다. 반대로 그 외에 풍경 등이 그려진 것은 고작해야
산업시설 따위가 전부인데 이것을 보면서 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절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를 폄하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아달라.)
먼저, 모든 단위에 호치민 초상만 있다는 것. 그만큼 호치민이 베트남에선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도 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호치민 말고는 그렇게 존경할만한 인물도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이순신,이황,이이,세종대왕,신사임당이 있지 않나? 다음은 그 외의 풍경 같은 것이 산업시설 밖에 없다는 것. 이것 역시 베트남에는 아주 자랑할만한 유산이라던지, 유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베트남의 역사가 남(南)으로의 진행으로, 그것도 당에게서 독립한 이후부터라고나 할 수 있으니, 크게 긴 역사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하다못해 대월사기 같은 책의 내용을 우리나라 만원권에 용비어천가 실듯이 실어 놓아도 좋을 듯 한데 왜 안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사회주의 국가라 그 전 왕조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캄보디아 돈에도 눈이 갔다.
캄보디아 돈에는 심지어 초상이 없다. 대개 왕국이면, 그 나라 왕의 초상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다.
역사상 존경할만한 사람이 얼마나 없으며, 또 왕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떨어지는 지 또한 알 수 있다. 유적이야 뭐, 모두 앙코르 유적 그림으로 도배해놨지만. 근데 아니, 왕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지더라도, 내가 왕 같았으면 무조건 초상을 집어넣지 않았을까 한다. 화폐에 사람 초상을 넣는 것의 시작은 로마시대 카이사르가 금화에 자기 얼굴을 새기면서 시작된 것. 카이사르가 왜 자신의 얼굴을 새겼는가? 따로 홍보하지 않고,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 아닌가? 무의식중에 얼굴을 보아가면서 충성도도 증가하고 말이다. (물론 자유주의 국가 사람으로서 전제주의 국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제군주의 입장이라면)그런 좋은 방법을, 왕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캄보디아 국왕은 왜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그만큼 왕의 힘이 야간 것인가.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마치 캄보디아나 베트남을 가리켜 존경할 인물이나 역사 유적이 없다고 폄하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고통스런 역사를 겪어온 나라들이라는 것을 반증을 하고, 또 그만큼 아직은 자신의 것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고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하는 이야기이다. 절대 오해없기를 바란다.


밤이 되어, 호치민 공항에 들어왔다.
이전에 미리 수거했던 여권을 호치민 공항에서 나누어주고 보딩을 하고 짐을 부쳐 버린 뒤
호치민 공항의 면세구역으로 들어갔다. 이제 한국으로 간다고, 몇몇은 호치민 공항서 이미 겨울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더 이상 힘들지는 않아도 되지만, 앞으로 몇 시간 뒤면 이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슬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나 항공의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 시간으로 0시 가량에 출발했다.
비행은 5시간 정도를 하였고, 그 시간대가 딱 취침 시간이다 보니 대개는 잠이 들었다.
나는 그 동안 몇 일 못 썼던 일기를 마무리하다가 잠들려고 하는데 한 동생이 와서 나에게 무언가를 주었다.
그것은 비행기 내에 있는 항공사 자체의 편지지. 거기에는 그 동생이 나에게 쓴 편지가 있었는데,
보름동안 고마웠다고, 앞으로 서로의 꿈을 향해 달려가자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 이상 공개하면 안되기에?)

이 편지를 받고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 이렇게 해야겠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편지를 써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에서는 처음하는 말이지만,
이 동생은 다니는 동안, 참 철든 모습을 보여줬었다. 고작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생각하는 것은 가끔 훨씬 어른일 때도 있었다고 할까? 배울 게 많은 동생이었다.)

그래서 나는 CA에게 부탁해 편지지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국청단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썼다.
(편지지가 모잘라다 보니 못 쓴 사람도 있다.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수십명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한국에 도착하는 시간이 되었다. 결국 한숨도 못잔 것.
한숨도 못잤지만, 모두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편지를 하고, 또 그 사람들이 나에게 편지를 써 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을 들으면서,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시간 가량 비행했고, 도착해서 한국 시간은 7시 정도였다. 모두들 짐을 챙겨 다나온 뒤, 마지막으로 모여
성모송을 기도로 바치고 해산하게 되었다. 이제 영영 못보는 것은 아니기에, 펑펑 우는 것은 아니었으나, 앞으로 보기가 힘들어질 것은 맞기 때문에
서로 꼭 안아주면서 작별인사를 하였다.


보름 간의 17차 국제 청소년 지원단 활동.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그 동안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캄보디아의 청소년들과의 우정. 그들의 역사에 대한 고찰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난 함께 했던 17차 국제청소년지원단원들과의 우정이 가장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름 간의 만남이라고, 우정이래봤자 얼마나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런 열약한 환경에서 함께하면서 우리가 가지게 된 우정은
2주일의 만남에서 얻는 게 아니라 2년, 20년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진한 우정이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난 참 고맙고, 또 행복했다. 앞으로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겪을 때마다, (당장 올해 대입이라는 고난이 다가왔지만) 그들과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행복했던 것을 '추억'하는 것이 끝이 아니다.
국제청소년지원단을 통해 맺어진 이 우정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고 있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에서의 활동은 끝. 그러나 우리의 우정과 행복은 계속...]


P.S. 지금까지 모든 국청단 글에 다른 국청단원들 사진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저작권 표시는 지우고 블로그 주소만 적었습니다. 모두들 양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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