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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역사,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현실. <국립박물관,킬링필드,TuolSleng> [2010.01.20 in Phnom Penh]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2. 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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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날은 전체적으로 프놈펜 시내를 견학했다.
갔던 순서는 글을 싣는 순서와는 관계가 없다.
돈보스코 기술학교서 나와서 가장 먼저 간 곳은 킬링필드이고 그 다음엔 점심식사를 하고, 그 뒤 프놈펜 국립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그 다음엔 TuolSleng수용소에 간 뒤, 마지막으로 백화점에 갔다.

하지만 글을 싣는 순선느 국립박물관,킬링필드,TuolSleng을 묶어서 한 개로 쓰며, 그 다음 점심식사를 한 왕궁 앞과 백화점은 다음 글에 싣도록 하겠다. 이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20일 점심을 먹고 간 곳은 프놈펜의 국립 박물관이다. 사실 이런 박물관이 프놈펜에 존재하는 게 옳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왜냐하면 이 박물관의 주 유물은 8C부터 13C까지, 요컨대 캄보디아 역사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기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시대에는 프놈펜은 수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씨엠립에 있는 앙코르 유적이 수도였지, 프놈펜은 타이의 침략을 피해 1440년대에 천도한 곳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유물들 자체가 프놈펜에서 발굴된 것이라기 보다는 앙코르의 유물을 가져다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박물관 내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동남아 힌두교/불교의 아름다움을 묘사해 줄 여러 조각물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이 강역도만큼은 찍을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 나타난 크메르 제국의 강역도를 보면, 지금의 캄보디아의 영토보다 훨씬 큼을 확인할 수 있다.
캄보디아, 현 남부 베트남, 타이 전체, 라오스 전체, 동부 미얀마 일부 이렇게 말이다.

심지어 고교 세계사 시간에도 잘 배우지 않는 동남아의 역사에는 여러가지 제국이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큰 제국이라면 누구라도 서슴치 않고 인도차이나반도를 호령했던 크메르제국을 꼽을 것이다. 이런 위대했던 제국이 존재했던 시기의 유물을 전시한 만큼, 박물관 내의 전시품들이 비록 약 500여년정도의 유물만, 그것도 주로  조각물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성은 떨어지지만, 위대한 제국의 조각상들인만큼, 그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힌두교 조각상과 불교 조각상이 그것이다. 현재는 캄보디아란 국가가 불교 국가이지만, 과거 크메르 제국기에는 왕이 믿는 종교에 따라 힌두교가 국교가 되기도 하고 불교가 국교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앙코르와트나 앙코르톰에서도 유적지가 처음엔 불교식으로 만들어진 게 다 뜯어내고 힌두교식이 되었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물론 11세기 이후로는 불교 국가가 되었다고 하는 게 옳겠지만.

힌두교조각상들은 물론 힌두교의 신들을 조각한 상이다.
힌두교에서는 비슈누를 주신으로 모시는 만큼, 전 시대를 걸쳐 비슈누 신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각되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신상으로는 파괴와 창조의 신이라는 시바의 신상이 한 개 정도, 인드라의 신상, 가네샤의 신상, 가루다의 신상 정도가 전부랄까?

불교 조각은 불상과 야차 상이 주를 이루었다.
한 가지 특징적인게 뭐냐 하면은, 힌두교 조각상들은 모두 석상이었고, 11세기 이전까지 주를 이루는 데 반해, 불교 조각의 겨우에는 석상 뿐 아니라, 동상도 주로 있었다는 것이며, 그 시대가 전 크메르 제국기에 걸쳐 있으며, 동상의 경우엔 비교적 후기에 제작된 것이 많다는 것이다. 불교의 신,부처들은 내가 잘 알지를 못해서 누가 누군지는 구분은 잘 되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다.

1층 밖에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관람을 마치고 나왔다. 여느 박물관들처럼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나는 책을 둘러보게 되었다. 여러 책들이 있었지만, 돈이 별로 없었던 나는 살 만한 것은 없었고, 한 3~40장 정도의 The Customs of Cambodia를 샀다. 이 책은 1296년에서 1297년 1년 동안 원(元) 성종 테무르 칸 대에 크메르 제국에 사신으로 와 인드라바르만 3세의 곁에서 머물렀던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영어 번역해 놓은 책이다. 사실 지금의 앙코르에 대한 연구도 모두 이 진랍풍토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 책을 살 때는 그런 줄 모르고 샀었다. 잘 산 것 같다.



국립 박물관 입구에는 잡상인이 있었다. 개중 다리가 없는 사람이 엽서를 팔고 있었다. 10개들이 엽서뭉치 1개를 2달러에 팔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에게 선물해 줄 필요도 있을 듯하고 해서, 엽서를 살려고 이 사람에게 갔다. 비록 잡상인들이 바가지 씌운다고는 하지만, 정찰제보단 싸게 살 수 있으니깐. 난 먼저 2개 1달러를 제시했다. 그러자 그는 안된다고 하였고 타협을 하다보니 3개 2달러가 나오게 되었다. 그가 안된다고 하면서 나에게 남긴 말은 바로 "I'm Hungry.". 결국은 타협해 3개 2달러에 낙찰되었지만, 그렇게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캄보디아 역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보관된 장소 앞에서, 현실이 드러나 있던 것이라고 할까.


맨 처음 갔던 곳이 바로 프놈펜의 킬링필드이다. TuolSleng에 수용되어 있다 처형을 하기 위해 보내졌던 곳이라고나 할까. 그런 곳이다. 이 곳을 가기 위해선 먼저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전 국왕이었던 노로돔 시아누크가 1970년 3월, 모스크바에 가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캄보디아민족의회는 모스크바에 시아누크가 가 있는 사이 시아누크를 완전히 쫓아내기로 결의하고, 크메르 공화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 크메르 공화국은 1970년 10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놀 장군이 총리로 취임했다. 크메르 공화국의 론놀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크메르공화국은 우파 성향이 강했다. 시아누크는 왕이지만 '불교 사회주의'라는 이상한 사상을 만들고 했던 만큼, 기본적으로 나라를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운영했었다. 그랬던만큼 캄보디아 사람들은 우파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더군다나 론놀정부는 부패가 심각했기 때문에 국민들은 지방에서 생긴 반정부 공산군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 반정부 공산군이 바로 그 유명한 크메르 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루주군은 무능한 론놀정부군에게 계속 승리를 거두었고 마침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프놈펜을 점령한 크메르루주는 크메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민주캄푸치아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캄보디아가 크메르루주의 세상이 되면서 지도자로 떠오른 인물이 있었다.
그는 샐로스 사르(Saloth Sar)라는 인물로 인간백정이라고 불리는 폴 포트(Pol Pot)와 동일인물이다.
폴 포트는 1975년 새로운 캄보디아 창조를 선포하며, 나라를 완전히 공산화시키에 이른다. 모든 경제행위가 금지되고 배급을 통해 이루어지며, 종교와 교육 역시 금지되고 공산사상 교육이 모든 걸 대체하는. 또한 이 상황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무산계급의 적, 역사적으로 캄보디아를 항상 괴롭힌 친 베트남 세력 등 이런 세력들을 모두 죽였고, 이것은 양민 학살로 번져 민주캄푸치아 시기에 200만명의 캄보디아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1979년 1월 7일 베트남 공산당에 동조하는 공산당원 수만을 죽인 것을 이유로 침공한 베트남에 의해서 숨어버린 정권이 되었고, 1998년 캄보디아 국으로 바뀌어 3개의 정파가 새 정부 구성을 논의할 때 여기에 끼어 있었다. (이 3개의 정파는 시아누크 세력과 비공산주의세력인 손산 세력, 그리고 크메르루주이다.)


대강 이정도에서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 킬링필드라는 곳은 바로 민주캄푸치아의 치세 시절에 학살 당한 사람들이 묻혔던 곳이다.
이런 장소가 캄보디아 내 수십 곳이 있는데, 개중 프놈펜의 이곳에서는 1만 6천여명이 묻혀있었다고 한다.

입장을 하면은 맨 처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위령탑이다. 위령탑 앞에서는 사람들이 묵념을 하는데, 이 위령탑안에는 크메르루주 치하 희생자들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킬링 필드 내부에는 곳곳에 이런 장소가 있다. 유골이 발견된 장소.
어린아이와 여성을 죽여 묻은 곳, 머리를 잘라낸 시체를 묻은 곳 등등 말이다.
사진의 장소는 '머리가 없는 400구의 시체가 발견된 곳'이라고 한다.

채 30년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장소. 그렇다 보니 당시 희생자들의 옷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그 만큼, 그렇게 오래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생자들 유골이다. 안에 보관할 장소가 없었는 지 위에다 올려놨다.
보는 사람들이 더욱 더 끔찍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런 킬링필드의 옆에는 논이 있다. 그리고 이 논에서는 농사를 짓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이런 비극적인 곳 옆이지만서도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은 TuolSleng이다. 크메르루주 치하에서는 S-21이라고 불리었다고 하는데, 킬링필드에 보내지기 전에 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수용해 놓았던 수용소라고 한다.

고문을 할 때는 이런 장치에 묶어놓고 했다고 한다. 사진은 하나만 찍었지만, 각 방마다 다양한 고문기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킬링필드에서 본 것보다 더 많은 천 조각들이다.

희생자들의 사진이다. 개중에는 캄보디아 인이나 크메르루주가 미워한 베트남 인이 아니었던 호주 사람도 있다.
거기서 본 고문도구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이었다. 의자에 앉혀놓고 전기드릴로 머리를 뚫어 죽여버리는 것.



이런 곳들을 다녀오면서, 여러가지 착잡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초기 동남아에서 가장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왜 이렇게 가장 비극적인 역사를 겪어야만 했을까.
사람이란 것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가 등 말이다.

폴 포트, 샐로스 사르라는 인물에 대해서 대개 사람들은 모두 인간 백정 천하에 죽일 놈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샐로스 사르는 죽일 놈이다. 용서 받아서는 안될 놈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샐로스 사르가 그렇게 인간 백정처럼 모두를 죽이려고 했을까는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샐로스 사르가 1998년 사망할 때 한 말이 있다. 혁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못난 캄보디아인들과 못된 베트남인들만 아니더라도 새롭고 행복한 사회주의 천국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샐로스 사르가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난 이런 말 때문에, 히틀러 같은 미치광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독일 모든 곳을 폭파시켜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살한, 국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공명을 위해서 움직인 정신병자와는 조금은 다르게 봐야 할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샐로스 사르는 교사 출신이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 언제나 캄보디아에 고통을 준 베트남을 증오했다. 요컨대, 그는 자신의 나라의 통사(痛史)를 보면서 너무나도 이 현실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이것을 바로잡는, 캄보디아를 세우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의 해답은 그가 찾기에는 사회주의였고, 그래서 사회주의 질서로 모든 것을 재창조 하려고 했으며, 고통을 준 베트남의 색채를 지우려고 했던 것이다.

함께 갔던 국청단의 신부님이나 여러 사람들은, 특히나 천주교 신자기 때문에, 크메르루주의 생명 경시 풍조를 가장 증오했다. 물론 나 역시도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나 존중받아야 되는 고귀한 가치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봤을 때, 빛나는 시기든 슬픈 시기든 한 사회가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폴포트는 처음, 그가 말한 새로운 캄보디아 창조를 위해서 부패한 자들, 유산계급, 지식인, 친베트남파 등을 희생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후기에 가서는 변질되어 양민을 학살하기에 이르렀고, 그래서 크메르루주는 살인정권이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초기 이념은 그런 학살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 이상을 그 아랫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나는 그것을 국가의 근본이 되는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캄보디아엔 한 국가를 지배하는 철학이 없다. 우리나라는 최소한 유교라는 가치가 수백년을 지배해 왔는데 말이다. 신부님식으로 말하면 사회주의가 종교를 인정하지 않기에, 종교가 없으므로써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지만, 난 조금 다른 생각이라는 것이다.) 하위의 실행에 옮기는 계층으로 갈 수록 변질 되었고, 결국 양민을 살해하는 집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란 거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기간 동안 200만명의 사람이 죽었고, 이는 살인 집단 크메르루주에 의해서 죽은 사람도 있지만,
이 200만 중에는 론놀정부를 지원한 미국의 폭격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비난받지 않고 있다. 왜? 현재 그 나라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크메르루주가 잘했다는 게 결코 아니다. 씻을 수 없는 만행이며, 살인 집단이다.
하지만, 적어도 초기 이념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란 거고, 또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 대상은 비난받지 않는다는 것. 이런 것을 상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슬프다.
캄보디아의 역사가 처음엔 화려했지만, 근현대에는 얼마나 비참했는 지 알 수있다.
이런 슬픔의 역사를 딛고, 앞으로는 희망의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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