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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돈보스코 기술학교 [2010.01.19 - 01.21 in Phnom Penh]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2. 11.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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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탐방을 떠난 버스가 5시간에 걸려 도착한 곳은 프놈펜에 있는 살레시오회 소속 학교인 돈보스코 기술학교이다. 학교에 도착해선 다소 어리벙벙했다. 학교 규모가 너무나도 컸다고 할까? 인두옹첸과 살라발랏 같은 곳을 보다보니 캄보디아 내에 살레시오회가 만든 학교는 규모가 작을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판단을 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나중에 박경석 수사님께서 소개해주시는데, 이 돈보스코 기술학교는 약 600여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인 학교로, 말그대로 산업기술을 가르치는 학교인데, 캄보디아 내에서 굉장히 인정받는 곳이라 이 곳을 졸업하면 캄보디아 내 유수의 기업들이 곧바로 채용해간다고 하는 정도이다.

살레시오회 소속 학교들은 어디든 돈보스코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성 돈보스코의 동상이 있다.

국제청소년지원단은 내가 갔다 온 17차까지 합쳐 총 3번 캄보디아에 파견되었었다.
개중 15차국청단은 이 곳 프놈펜 기술학교를 방문해 기술학교 공사를 보조했다고 한다. 그게 딱 1년 전 일인데, 이준석 신부님이나 함께 갔던 국청단원 동생 녀석이 15차에 다녀왔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5차 국제청소년지원단이 페인팅한 것이라고 한다.

바탐방에서 떠날 때부터 15차를 다녀 온 그 동생으로부터 기술학교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바탐방 인두옹첸에서 아무래도 열약한 시설서 생활했던 우리었기 때문에 작업을 마치고 가는 이 곳의 환경은 어떨까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환상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우리들이 관심을 가진 건 세 분야 정도가 있다. 씻는 것. 자는 것. 그리고 먹는 것.

씻는 것에 대해서라면, 정말 환상적이었다. 먼저 샤워장이 따로 있었다. 샤워장이 있다고 해서 샤워기가 있다거나 이런 황홀한 상황은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샤워장 안쪽 모서리에 물이 채워져 있었는데, 먼저 이 물은 물이 맑아 바닥이 보이는, 그런 깨끗한 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더러울 수도 있다. 그 바닥에는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으니깐. 하지만 당시 바탐방에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흙탕물로 몸을 씻어왔는지라, 바닥이 보인다는 이 사실 하나만에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샤워장을 가장 먼저 쓴 친구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야 물이 바닥이 보여!!"라고 소리질렀으니깐.

또한 이 물은 쓰면 수위에 따라 자동으로 물이 채워지는 최첨단(?) 방식이었다. 요컨대 씻을려고 미친듯이 펌프질 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 우리는 여기서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행복을 누렸다. 바탐방에서는 감히 하지도 못하던, 샤워할 때 막 물을 몸에 퍼붓는다던지, 그런 것을 말이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그조차 못누리는 사람들도 있는거다. 그러니 우리는 완전 초호화 생활을 하면서, 가끔 물이 따뜻한 물이 안나오니 하는, 배부른 소리 하지 말자.

자는 것은 살짝 실망이었다. 애초에 그 동생한테 들었을 때는 2층의 교실 뒤쪽에서 잤었는데, 거기는 공간이 일단 무지 넓다는 것이다. 또 깨끗하고. 벌레 시체가 바닥에 잔뜩 쌓여있지도 않고. 하지만 우리 17차가 와서 배정받은 것은 1층의 음악실 하나이다. 적어도 바탐방에서는 25명(과 부제님 신부님)의 남자들이 3개의 방을 쓴 셈이기 때문에 각자 각자의 모기장을 펴 놓고 잘 수는 있었다. 하지만 프놈펜에선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바탐방 교사의 한 방 크기의 규모에 25명이 다 자야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들 모기장을 펼치지 않고 잤는데, 다음날 미친듯이 모기에 물렸다. 방에 있는 가방을 치울 때마다 모기가 수십 마리가 올라오는 그 광경을 생각하면... 뎅기열이나 말라리아 안 걸린 게 정말 다행이다. 다행히 둘째날 밤에는 어떻게 한 7명 정도가 2층에서 잘 수 있게 되면서 조금 공간이 널널해져서, 하나의 텐트를 펼쳐 두 명이 안에서 잤다. 모기는 물리지 않았지만. 영, 바탐방에 비해서는 좀 힘들었다.

마지막 먹는 것은 만족이었다. 바탐방에서 캄보디아 현지식에 완전히 입맛을 잃은 우리들이었는데, 프놈펜에 와서는, 비록 한식은 아니었지만, 빵과 고기 등이 차려진, 일종의 서양식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양도 넉넉한 편이었기에 모두들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매일 개인에게 개인 생수를 한 병씩 따로 지급한 것도 크다고 할까?

사실 어느정도는 우리가 잘못된 것도 있기는 하다. 그 나라에 왔으면 그 나라의 음식에 입을 맞추는 게 가장 당연한거고 최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되는 데, 그렇게 할려고 하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건강을 위해서, 이런 식사를 하게 된 거고, 또 그래서 조금은 생기가 돌아온 것이다. 바탐방에서 그렇게 많이 아프던 아이들이 여기선 매우 줄어버린 게 여기서 기인할 것이다.

돈보스코 성인의 사진(초상?)이 걸려 있고, 십자가가 걸려 있어서, 나는 저기로 들어가면 그게 성당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당 입구더라.

프놈펜에서도 역시 미사를 드렸다. 마지막 떠나는 날의 경우엔, 베트남으로 가면 단체로 모이지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은근히 신부님이 압박을 주면서 미사 참여를 유도했기 때문에, 새벽 6시에 한다는 힘든 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미사에 참여했다. (물론 그 말씀 안하셨어도 난 참가할 생각이었다.)

그 미사 때는 이준석 신부님이 하신 게 아니라, 바탐방에서도 만났던 필리핀사람으로서 태국 소속으로 캄보디아 기술학교에 계시는 레오 신부님이 주관하시는 미사였다. 이 미사에는 기술학교 학생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는데, 그것을 볼 때는, 이 기술학교는 이렇게 매일같이 미사를 드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새벽 미사에 많은 기술학교 학생들이 참가한 것도 그렇고, 매일 아침 새벽 6시에 일어나 샤워장으로 갈 때면, 교실을 지나가야 되는데 이미 그 때 학생들이 와서 준비를 하고 있거나, 또는 수업을 받는 교실도 있는 것을 보면서 이 학교는 도대체 등교시간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했다. 한국의 고등학교들은 0교시 한다고, 아침잠 뺏는다고 난리인데, 이 학교 학생들은 그보다 훨씬 일찍 나와서 공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하다. 이 학교 학생들은 본인들이 희망해서 온 학생들이다. 스스로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한 것. 스스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꼭두새벽에도 나와서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6,70년대 우리 부모님 세대 때에도 학교를 이렇게 다니셨겠지? 캄보디아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 캄보디아가 좀 더 희망 있는 나라의 모습을 가져간다는 의미도 아닐까 한다. 덧붙여 지금은 실종되버린, 우리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의지도 다시 용솟음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시설이야기를 좀 하겠다. 교육과정상으로는 한국의 고등학교의 개념이 되는지, 대학교의 개념이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규모면에서 보면 고등학교라 하기에는 무지 크고, 대학교로 하기에는 좀 작은 감이 있는 학교이다. 그렇게 규모가 있는 학교인 만큼, 여러 건물 외에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꽤나 있었는데, 그건 축구장과 농구장이었다.

실제로 국청단원이 이용해 본 것은 농구장이었다. 기술학교에 온 당일, 농구장이 있는 것을 보고 농구장에 가 기술학교 학생들과 농구시합을 붙었는데, 완전히 참패당했다고 한다. 캄보디아 학생들은 날아다닌다나 뭐라나. 그냥 농구하러 간다길래, 야구외의 모든 스포츠에 그닥 관심없는 나로서는 신경도 안쓰고 있었는데, 하고 온 애들이 현지 학생들과 경기했다는 걸 듣고, 구경이나 갈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장은 사용하지 않았다. 근데 실제로 사용되는 가는 모르겠는게, 캄보디아는 소를 막 풀어놓고 다니는데, 이 소들이 막 변을 싸질러 놓고 다니는 것이다. 또 그게 축구장에도 있었고. (길에도 있었다. 난 모르고 길을 가고 있는데 뒤에서 "오빠, 소똥 밟았어요."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어휴,,,, 뭐 그 때 신고 있던 게 내 신발은 아니니깐.ㅋㅋ )

우리가 숙소로 사용한 건물 앞에 있었던 공터이다. (아까 Cambodia-Korea 페인팅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프놈펜에선 우리가 바탐방에서처럼 기도모임을 가질 때 모일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기도모임을 드렸었다. 프놈펜에 우리가 머문 게 2박 3일. 그렇기 때문에 단 두 번의 기도모임을 드렸었지만, 마지막 날은 인상 깊은 기도 모임이었다. 함께 간 국청단원이었던 일본에서 온 누나의 생일(다음 날 못해서 하루 앞당기긴 했지만)이자, 함께했던 동생의 축일(사전에서는  [하느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성인 등에 특별한 공경을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서 제정한 날 ]라고 정의하고 있다. 무튼 천주교 신자가 가지는 세례명의 성인의 축일인것이다.)이기도 했던 것이기에, 그날 둘다를 축하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바탐방에서 우리와 함께 작업을 했던 Sorphea와 기술학교 학생도 함께 기도모임에 참가했다. 비록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이정은 부제님께서 옆에서 어느정도는 통역해 주셨다.), 서로가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 역시 축하하는 마음을 가졌으리라.


바탐방에서 열약한 생활을 마치고, 프놈펜에 와 비교적 조금은 여유롭게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프놈펜 기술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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