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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을 생각하며. 꾸치(Cu Chi)터널 [2010.01.23 In Cu Chi]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2. 15.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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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청단 마지막 날. 밤에 호치민 공항에서 인천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타기 때문에, 이 날은 호치민으로 이동해야 했다. 호치민으로 이동하기 전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 대항한 베트콩들이 숨어서 저항했던 꾸치(Cu Chi)터널을 가 보게 되었다.

꾸치 터널은 월남전 당시의 상태라기 보다는 방문객들이 쉽게 돌아보고 돌아갈 수 있게 관광지化 시켜놓은 땅굴이다.
가장 먼저 가게 된 곳은 바로 베트남전 당시 꾸치 터널의 상황을 묘사한 VCD를 보는 곳 이었다.

여러나라 관광객, 특히 한국의 관광객이 많이 옴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그 영상은 우리나라말로 더빙되어 나왔다.
킬링필드에서 영상이 영어로 나와 많은 아이들이 존 것에 반해서는 조금 나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억양이 마치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에 나오는 성우 목소리 갔다고나 할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엔 웃다가 나중에 지루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남녀탐구생활 성우 목소맃럼 재밌으면 몰라도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영상은 이 꾸치 터널이 어떻게 사용되었고 당시의 상황 같은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 영상에서 남베트남을 가리켜 '사이공 괴뢰정부'라고 칭한다던지, 미군을 가리켜 '악랄한' 미제 침략자라고 부른다던지 하는 것을 보면서, 확실한 사회주의 국가는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어이가 없었던 것은 소총으로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켜 미군살생용사의 칭호를 받았다는 베트남 군인 이야기였다 ㅋ.

땅굴 들어가는 입구이다.
일반적으로는 나무판이 덮여있고, 나뭇잎을 덮어놔서 땅굴 입구인지 쉽사리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이 땅굴입구는 매우 좁은 편이라서 국청단원들 중에서도 몸이 매우 슬림한 사람들이나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베트남전 당시에는 이것보다 입구가 절반 크기였다고 한다.
신체 크기가 왜소한 베트남인들이 쉽게 들어가고, 반대로 육중한 미군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


당시 군인의 모습과 탱크의 모습.

꾸치 터널은 게릴라전을 펼쳤던 베트콩들의 은신처였던만큼, 쉽사리 밖에서 파악할 수 없는 구조를 가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트랩들이 만들어져 있다. 밟으면 빠지는 데 창 같은 게 있다거나, 이런 것은 양반이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전쟁을 할 때, 개머리판으로 문을 부수지 않나? 혹시 안에 무언가 있을까를 대비해.
그런데 개머리판으로 문을 때리면 그 반동으로 트랩이 튀어나오게 하는 장치도 있었는데, 정말 식겁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사람을 잔인한 도구를 만들어내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땅굴 내부를 쭉 돌아다니면서 끝까지 나와 보았다.
처음엔 궁금해서 들어갔지만, 혹 여기를 가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권해주고 싶다.
일단 체구가 왜소한 베트남인 조차 쉽게 다닐 수 없는 작은 길이라 다니기 매우 힘드며, 불빛은 찾아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땅굴이다 보니 온도가 매우 높아 땀을 뻘뻘흘리게 된다.
오죽하면 어떤 아주 착한 동생이 어떤 형에 의해 반강제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 그 형 이름을 외치면서 나왔을까.

이 꾸치 터널은 베트남전 때 만들어 진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프랑스 강점기부터 프랑스 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수십년동안 이렇게 열약한 환경에서 투쟁해 온 사람들.

비록 독립이, 통일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을 수십년동안 신념으로 지켜오는 게 과연 그렇게 쉬운 일일까?
우리나라의 독립 투사들 일부도 보면은 끊임없는 일제의 압박과 회유에 못 이겨 결국 친일파로 전향한 사례로 없지 않게, 않이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베트남이라고 그러지 않았진 않다. 하지만, 투쟁 기간이 수십년이 되면서도 꾸준한 신념을 가지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난 이 이유를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치민에게서 찾고자 한다.

호치민.
프랑스 공산당의 일원으로 공산주의자였으나, 또한 베트남 민족을 생각하는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사상과 민족주의사상을 결합한 민족주의 바탕의 사회주의를 창시해낸 베트남의 지도자로, 비단 이런 사상적 면모 뿐 아니라, 뛰어난 리더쉽을 가지고 있어서 2차대전때부터 군대를 이끌고 활약했으며, 독립 후에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의 원수로서 10년이 넘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결국 승리(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를 거둔 자. (물론 휴전 전에 죽었지만.)  한국의 항일 투쟁 위인 중에서 우리의 광복과 통일을 염원하셨던 김구 주석님에 비견될만하다.

나라를 독립,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표를 향해 하나로 단결시키고, 또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후에도 그의 영향력으로 인해 나라가 하나로 단결되어 간다는 것. 이런 지도자는 한 세기에 한 명 보기도 드문 지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베트남 동에는 모두 호치민 얼굴만 들어가 있을까.)

이런 훌륭한 지도자를 둔 베트남이라는 국가가 참 부러운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보면 똑같은 공산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캄보디아의 샐로스 사르. 폴 포트와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호치민이나, 폴포트나, 나름대로는 자신만의 이상국가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호치민은 국부(國父)로 만들었고, 폴포트는 인간백정으로 만든 것일까? 심지어, 베트남전에서도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말이다. '전쟁'이라는 수단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어느정도 정당화시켜주기 때문도 아닐까 한다. 베트남은 미국이라는 다른나라와 전쟁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보다도 나는 사회 기반에 뿌리 박힌 사상의 문제를 들고 싶다.
베트남의 근본적인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한국과 중국과 통하는 유교 사상을 들 수 있고, 캄보디아의 경우엔 소승불교를 들 수 있다.
유교 사상이란 대표적으로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다는 사상이고, 나라에 대한 충(忠)을 강조하고 있는 사상이다.
반면에 불교 사상은 해탈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개중 소승불교의 경우에는 다른 것보다도 개인의 수양을 더욱 중요시한다.

요컨대, 불교 사상, 특히 소승불교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의 강조보다는 개인의 해탈을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고, 유교 사상의 경우엔 전체주의(전체주의라고 하면 파시즘을 떠올려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되나 파시즘이라기 보다는 사회를 더 생각하는 사상)적 성향을 띄기 때문에 좀 더 국가,민족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폴포트,호치민 모두 나름대로의 이상국가관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는데,
호치민의 경우 그런 사상적 기반의 아래에서 모든 것이 올바르게 움직여진데 반해, 폴포트의 경우엔 나름의 이상론이 하부로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다 보니 살육을 하게 되고, 또 그 자체에 미치게 되어버리면서, 킬링필드(Killing Field)라고 불릴만큼, 무차별적인 학살을 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려 성종대 최승로가 '불교는 수신의 도이고, 유교는 치국의 도'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인해 한 나라는 그 나름대로 바른 방향으로 (물론 폴포트가 옳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해없길 바란다.)나아갔을테고, 그랬다면 인간 도살장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고, 과거 크메르의 영광을 어느정도 복원하지 않았을까.

똑같이 공산국가를 지향했지만, (공산국가로써는 아니지만)자주,독립,그리고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 베트남을 보면서
호치민이라는 인물, 그리고 다시금 폴포트에 대해서 떠올려보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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