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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발랏에서의 힘들지만, 뜻깊은 공사. [2010.01.10 - 01.19 In Battambang]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2. 2.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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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도 알 수 있었듯, 작업을 한 학교와 머물렀던 곳은 다른 곳이다.
작업을 한 학교는 '살라발랏' 이라는 곳. 인두옹첸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인두옹첸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인두옹첸 주변의 길을 제외하고는 모든 길이 포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실제론 걸린 시간은 1km를 가는 시간보다 훨씬 더 걸려서 간 듯 하다.

살레시오회, 돈보스코교회에서 하는 가장 큰 공익사업은 누가 뭐래도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이미 모든 국민이 교육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나라의 경우엔 영상학교와 같이 특성화된 분야의 학교를 설립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엔 저개발국가이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느라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서, 초등학교와 같은 기초교육과, 기술을 가르치는 기술학교가 살레시오회에 의해 설립되어져 있다. (프놈펜 기술학교서 본 지도에 따르면, 캄보디아 총 5도시에 살레시오회가 세운 학교가 있는 듯 했다. 개중 타이와의 국경 지역에 포이펫(Poipet)이라는 도시에도 살레시오회의 학교가 있는데, 씨엠립 공항까지 함께 했던 의료진들은 이 포이펫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

전체적인 하루 일정은 이랬다.
아침 7:30 정도에 인두옹첸에서 버스를 타고 살라발랏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살라발랏에서 한 뒤, 공사 준비를 해 9시부터 12시까지 공사를 한다. 물론 그 사이에는 오전 휴식 시간이 있다.
12시부터 1시 30분까지는 점심 시간이고, 1시 30분부터 다시 5시까지는 작업을 했다. 오후 작업 역시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었다. 5시까지 작업을 한 뒤에는, 천주교 기반의 단체 답게, 동행하신 지도 신부님께서 미사를 하셨다. 이 미사는 주중미사이기 때문에 의무 참여는 아니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면 저녁 식사를 하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는 조금 쉬다가 버스를 타고 인두옹첸으로 복귀한다.
인두옹첸에 복귀해선 모두 씻고, 마지막으로 9시부터 하루를 마치는 기도 모임을 가진다.

이게 대략적인 하루일과이다. 하루 일과에서 있었던 자세한 일은 차차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국청단원들은 앞에서 나누어진 조 별로 공사에 착수했다.
농구장 바닥을 만드는 시멘트 작업장서 모래와 자갈을 나르고, 화단을 가꾸기 위해 흙을 퍼나르고, 시멘트 바르는 작업을 하는 등의 일을 했다.

내가 속했던 기쁨조의 경우엔 남자가 80%인 죄로 가장 힘을 써야되는 일에 배치되었다.
동남아는 세계에서 최고로 꼽히는 쌀 생산지역. 개중에서도 산업이 가장 낙후된 캄보디아는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주 산업이 여전히 농업이었고, 그에 맞추어 농업 교육장을 조성해야 했다.

우리 조가 한 일은 바로 이것. 농업 교육장의 일을 보조해 아래 기반을 덮고, 나아가 언덕과 같은 산을 삽과 곡괭이로 무너뜨려, 평평한 평지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한마디로 삽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긴바지를 챙겨오지 않아서 시멘트 작업 따위를 하면 맨살에 그대로 묻게 생겼었는데, 시멘트 작업이 아니라 묻을 일은 없었다는 것과 힘든 작업이라 이정은 부제님께서 우리 조와 함께 작업하셨다는 것 정도랄까?



우리가 작업했던 농업 교육장은 살라발랏 본 학교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주 떨어진 것도 아니었지만, 쉬는 시간마다 옮겨 다니는 게 꽤나 번거롭기는 했었다.

단순한 노동작업이라, 여자 빼고 8명이면 금방하지 않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법 하지만, 그게 또 상황이 그렇게 좋지가 않다. 장비가 매우 부족했던 것. 시멘트 팀꺼 거의 뺏다시피 해서 들고 온 장비가 곡괭이 두 개, 삽 한 개가 전부였다. 한 명씩 장비를 잡고 흙을 나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손이 비는 사람은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곡괭이나 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치면 교대를 하거나, 공사하는 사람들이 마실 물을 학교에서 떠오는 역할을 맡곤 했다.


내가 주로 맡은 역할은 바로 곡괭이질. 개중 떡대가 있는 편이라 당연히 집중 노동을 하는 쪽에 서게 된 것.
하지만 덩치가 있으면 무얼하나,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작업인데 잘 할 리가 만무했다.

곡괭이질을 하려면 들어올릴 때는 머리부분 가깝게 잡아 내려찍을 때는 아랫부분을 잡아 적게 힘들여 많이 파 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처음엔 그것을 모르다 보니 그저 중간 부분을 잡고 계속 파대기만 하니깐 힘은 무지 들고, 작업 능률은 떨어졌었다. 더군다나 캄보디아의 흙이라는 게, 세계지리 시간에 배우듯이, 한국의 흙과는 전혀 다른 라테라이트 土다. 이 라테라이트 토는 우기의 스콜 같은 것으로 인해 흙의 유기물이 빠지고 철분만 남아 산화된 토인데, 이게 물에 젖었다 다시 빠진 게 되다 보니 빠지고 나서 굳어버린 게 거의 돌 수준까지 되어버려, 파내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제대로 하지 못하니 형에게는 못한다는 소리 듣고, 또 위에서 연습장 작업하는 현지인(프놈펜 기술학교 학생들)들은 나를 보고 웃겨서 죽으려고 하더라.  뭐 누구는 처음부터 잘하나...

정말 다행인 게, 대한민국 성인 남성은 군대를 갔다 와야 되니 이런 노가다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이다. 조장 형이 군대를 다녀온 성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곡괭이질을 하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이걸 보면 남자는 군대를 현역으로 갔다 와야 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ㅋㅋ

형한테 배운 뒤로는 일취월장(?)해 곡괭이를 마치 내 몸처럼 다루게 되었다. 여러 친구들고 교대를 해가면서 일했지만, 부제님과 조장형으로 부터 "재용이만한 놈이 없다"는 립서비스인 듯도 한 칭찬을 들으며 곡괭이계의 제 1인자로 거듭난 것. 삽을 다루던 동생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으로 잘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매우 능숙하게 다루게 되었는데, 이러다 보니 서로를 보고 기쁨대학의 곡괭이과 수석이니, 삽가 수석이니 별명을 붙여주는 농담을 하면서 일을 하였다.

흙을 퍼나르는 일도 했었지만, 이 일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한 바가지에 가득 채운 흙의 무게는 아주 무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들고 수십미터를 간다는 것도 그렇고, 그 작업을 수십,수백번을 반복한다는 것도 아주 힘빠지는 일이었다. 아까 이야기 했듯, 라테라이트 토라서 돌 같은 게 나올 때도 있는 데, 이건 그거 통째로 옮겨 버려야 되서 흙을 나르는 것보다 더 고생하기도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씨 또한 문제이다. 일전의 글에서 캄보디아의 계절이 건기와 우기로 나뉘고, 1월은 건기라고 했었다. 날이 건조하다는 것은, 화창하다는 의미도 되는 데, 바꿔말하면, 햇볕이 매우 쨍쨍하다는 것이다. 땡볕 아래서 일하니 땀을 흘리는 것은 둘째치고 살이 따갑다는 문제가 생겼다. 참 여자애들 둘은 뭔 죄로 기쁨조에 배정이 되서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지, 내가 다 미안하더라. 그렇지만 그런 내색하지 않고 흙을 나르는 일을 묵묵히 도와주고, 분위기에 활력을 넣어주며, 가끔은 삽을 붙잡고 삽질하는 사진을 찍으며 '삽녀'라고 하기도 하는 등, 아무튼 그런 긍정적인 모습을 가져주는 게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학교에서 아주 떨어진 곳이다 보니 이런 이점은 있었다.
바로 옆에 작은 길이 나 있어, 그 길로 현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데, 개중에 매일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니며 야자수 주스를 파는 사람이 있었다. 기술학교 학생들이 일하다 사 마시며 한 모금 주길래 마셔봤는데, 달착지근한 게 힘든 작업 중에 매우 힘이 나게 해 주었다.

나중에는 우리가 작업하다가 이 야자수 주스를 사 마시기도 했다.
사진과 같이 큰 대나무 통에 들어있는 것을 1개로 치는데, 1개에 1500리엘했다.
4000리엘 정도가 1달러이니, 우리돈으로 한 3-400원 한 셈.

[다음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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