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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돈보스코 청소년 영성 사목 연구소에서.... [2010.01.08 In Seoul]

그의 해외발자취/[2010] 17차국청단

by 그라나도 2010. 1. 3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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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01.08 부터 24일까지 국제청소년지원단 소속으로 캄보디아와 베트남 해외교류를 다녀왔습니다. 그 후기를 쓰려고 하는 것인데요. 반말체로 쓰는 것 다소 양해부탁드립니다.)

 2009년 초부터 신청했던 국제 청소년 지원단. 중간에 나와 국청단 측의 실수로 마찰이 있었긴 했지만, 어떻게 되었든 국제청소년지원단 소속으로 캄보디아/베트남 해외교류를 가게 되었다. 

 내가 소속된 국제청소년지원단은 천주교 수도단체인 살레시오회 산하의 조직이다.
살레시오회는 예수회와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천주교내 3대 수도단체로 분류되는 단체로,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보스코(Giovanni Bosco) 성인이 1859년 성 F.살레시우스를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수도단체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지오반니 보스코 성인은 돈보스코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로 인하여 살레시오회는 돈보스코교회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살레시오회는 창설자 돈보스코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고아원 경영, 청소년 교육, 출반사업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현재(1999년기준) 세계 80개 국에서 수십만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광주광역시의 살레시오 고등학교와 서울의 돈보스코 청소년센터 등이 있고, 교류를 가는 캄보디아에는 총 다섯 도시에 살레시오회 설립 학교 등이 있다.

 국제청소년지원단은 살레시오회의 박경석 수사님과 현 중앙대학교 교수님이신 이명천 교수님이 2004년 뜻을 모아 제 3세계 청소년을 돕자는 의도에서 설립된 단체이다. 본인이 갔다온 캄보디아 교류까지 합쳐 총 17번의 국제청소년지원단을 세계의 다양한 저개발국가에 파견되었다. 이번 17차 국제 청소년 지원단은 박경석 수사님과 이명천 교수님 외에 이준석 신부님과 이정은 부제님이 지도하셨다.
(자세한 것은 페이지 맨 아래 백과사전 링크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 해외교류를 가리켜 국제청소년지원단 측이라던지, 모두들 '해외봉사'라고 말을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사실 해외봉사라고 하기에는 일정이 너무 짧고, 또 문화교류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개발국가의 청소년을 만나면서, 그것을 '봉사'라고 생각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 아닌가 한다.
내가 그 나라의 청소년들 보다 우월한게 무어가 있는가? 다만 좀 더 잘사는 나라에서 태어나서 물질적으로 조금 더 풍요롭다는 것뿐. 단순히 그것 때문에 내가 우위에 있는 사람이 열위에 있는 사람에게 베푼다는 개념인, '봉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접근해야 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죄스럽고, 또 옳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청소년의 입장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처럼 이것을 봉사라고 부르지 않고 해외교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7차 국제 청소년 지원단(이하 17차국청단)의 당초 계획 교류지역은 캄보디아가 아니었다. 아프리카 수단이 처음 계획 지역이었으나, 수단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 등으로 인해 민간인이 가기에는 매우 위험한 곳이라 부득이하게 2009년 중순 즈음에 캄보디아로 바뀌게 된 것이다.

 2010년 1월 9일부터 24일까지로 계획이 되어 있었고, 교류를 위해 10월 25일과 12월 12일 두 일에 걸쳐 사전모임을 하였었다. 당초에는 1월 9일 공항에서 모이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12월 12일 2차 모임에서 17차국청단원들끼리 서로 안면을 익히고 친해질 필요가 있다고 하여서 1월 8일까지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 영성 사목 연구소로 모여 합숙을 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1월 8일 오후 5시까지 소집을 했기 때문에, 부산에 사는 나는 12시에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떠나게 되었다. 8일 당시 서울의 최저기온은 영하 12도라고 했고, 최고기온 역시 영하권이라는 것을 들었었다. 한반도 남쪽, 바닷가에 살아 영하의 기온을 자주 경험하기 힘든 나는, 아주 춥지는 않을까 하여 등산복까지 껴입고 서울로 갔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았다. 서울역에서 내려 돈보스코 연구소까지 오면서 크게 춥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시리 짐만 되게 옷차림을 하고 온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확실히 부산과는 다른 점은, '눈'이 와서 쌓여 있었던 것이다. 부산에 있으며 올 겨울에 단 한 번 밖에 눈을 보지 못했던 나는, 쌓여 있는 눈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도, 조금은 고생을 했다. 개인짐 뿐 아니라, 현지 학생들과 교환할 선물이라던지, 현지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에 대비해 모두 들고 오라고 한 밑반찬이라던지, 이런 것들을 짊어지고 눈 쌓인 거리를 다닌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서울역 지하철에 들어오면서는 무심코 일반 개찰구로 들어갔다가 짐이 안 옮겨지는 것을 알고 다시 나와 휠체어용 개찰구로 들어가기까지 했었다.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 영성 사목 연구소는 8호선 보라매 역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사전 모임 때도 지하철을 타고 갔었지만, 이번엔 특별히 고생을 하면서 갔다. 다행히도 늦진 않고 4시 30분 정도에 도착했다.


서울 돈보스코 청소년 영성 사목 연구소 건물 내에 들어감녀 이렇게 돈보스코 성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옆에 있는 아이들 상이 같이 있는 것에서 느껴지듯, 돈보스코 성인은 청소년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활동을 하신 분이다.

 모임 장소에 올라가니, 어떤 분들이 왔는지를 확인하고 이름표를 나누어 주고 계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들 역시 국청단 소속으로 봉사활동을 가시는 분들로, 다만 대학생이고, 사회인이라는 것 때문에 조금 일찍 와서 업무를 보조하고 계셨던 것이다. (사실 다 형누나였는데 그 분이라고 칭하기도 뭣하긴 하다.)

 이름표를 받아서 보니깐 내 이름과 세례명 아래에는 '기쁨'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17차 국청단원을 4개 조로 나누어 4명의 형 누나 분들이 각각 조장을 맡아 운영하게 되었는데, 기쁨이란 그 4개 조 중 하나의 조 이름이었던 것이다.
기쁨조, 온유조, 평화조, 슬기조 이렇게 말이다.

 무튼 이름표를 받고 하루동안 여기서 지낼 방을 배정 받았다. 원래는 혼자 쓰는 방인 듯 했으나, 침대 한 개를 더 집어 넣어서 두 명이서 쓰도록 된 것이었다. 비교적 빨리 온 편이었는지, 룸메이트를 만나지는 못했다. 룸메이트가 온 뒤에도 거의 곧바로 저녁식사 시간이라 큰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것.

 저녁식사를 하러 이동했을 땐 40여명의 국청단원이 서로 서먹서먹했다. 2번이나 모임을 했지만, 지시 사항만 듣고 갔을 뿐, 서로 친해질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조장 형 한 분과 사전모임서 좀 친해졌을 뿐, 나머지 친구들은 아예 알지 못했었다.) 다행히도 저녁식사를 할 때 조금 적극적이던 한 동생이 우리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과는 조금 친해졌었다.

 저녁을 먹을 때 다소 의아했던 것이, 국청단원이 아닌 많은 청소년들이 같이 저녁 식사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서로는 아주 잘 아는 사이인 듯,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또 잔반처리, 설거지 등을 상의하면서 말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친구들은 돈보스코 영상학교 친구들이었다. (국청단에도 3명의 영상학교 친구들이 함께 했었다.)

 저녁 식사를 다 하고 나서, 강당 같은 곳에 모든 국청단원이 모였다.
먼저 조별로 앉아 서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국청단원이 남자가 좀 많긴 했는데, 어찌 된 건지 우리조는 총 10명 중에 여자가 2명 뿐이었다. (이건 나중에 현지에서 큰 어려움을 가져왔다.) 서로 자기 소개를 한 뒤에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하였다. 자기 조원 외에도 더 친해지라는 이야기. 서로 웃고 떠들고 하면서 조금은 가까워져 있었다.

 놀라운 게, 이 국청단이 천주교 재단 소속인만큼, 모두 다 나처럼 신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신자가 아닌 친구들도 꽤 되었던 것.

 일종의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끝난 뒤에는 스크린을 통해 한 가지 영상을 보았다.
2차 모임 때는 국청단원의 활동 영상을 보았었는데, 이번에 본 것은 KBS 일요스페셜.
전세계 저개발국가에서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면서 교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웃고 떠들고 하던 분위기는 진정되었다. 우리가 가는 곳도 이런 곳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17차 국청단원을 이끄신 이준석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가지 말라고. 여기에 가서 2주, 실제로는 1주일 동안 활동을 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결코 많지 않다고. 가서 우리가 배우고 오는 것이라고.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살면서, 저개발국가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에 조금이라도 책임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미 떠나기 전부터 봉사라는 개념이 아니라고 불러 왔던 나였지만, 또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언젠가 내 친구들이 캄보디아에 간다고 하니깐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 안에 사람들도 힘든 사람들 많은데, 뭘 다른 나라에 가서 도움을 준다는 거냐."

 신부님의 말씀, 그리고 언젠가 MBC TV 무릎팍 도사 '한비야 편'에서 한비야 씨가 말한 '세계시민의식'.
이게 이 말의 답변이 될 수 있을 듯 하다. 우리나라 안에도 힘든 사람이 많은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고 세계의 도움을 받고 일어선 나라, 그리고 이제는 G20 의장국이 될 만큼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한국의 국민으로서, 해외의 저개발국가를 돕는다는 것은 우리가 도움 받은 것을 갚는 것이기도 하며,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의 대열에 들어간 이상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영상과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다가, 일정은 마치게 되었고, 방에 가서 잠이 들게 되었다. 하지만 곧바로 잠들진 않았다. 새로 만난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2시나 되어 잠들었다.


 #2010년 01년 09일.
 아침식사를 하고는 각 조별로 모여서 이른바 '문화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결국 현지에서는 하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현지에 가서 현지 학생들에게 공연을 할 것을 각 조별로 준비를 해라는 것이었다. 어떤 조는 성가를 율동과 함께 준비하는 팀도 있었고, 또 어떤 조는 대중가요를 연습하기도 했다.

 우리 조는 조금 특이했다. 한국의 무예를 알리겠다는 생각이었는지, 태권도의 발차기 자세라던지, 격파 자세, 호신술 등을 연습했다. 조원 구성이 남자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도 여기에 한 몫 했을 것이다. ㅋㅋ

 하지만 안하던 것을 하는 데 잘 될 리가 있을까, 아무리 연습을 해도 모두의 자세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실제로 현지에서 안해서 다행이었지, 했다면 문화공연은 커녕 쪽팔림만 얻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친구들과 친해지라고 이런 활동을 했던 것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준비를 하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캄보디아로 떠나기 전 파견미사를 본 것. 파견 미사를 본 뒤에는 모든 짐을 버스에 실고 공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 다음 글에.]

살레시오회 백과사전 - [ http://100.naver.com/100.nhn?docid=858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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