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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16 in Hangzhou] 가무쇼

그의 해외발자취/[2007] 상해,항주,소주

by 그라나도 2007. 8. 3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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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에서 일정을 마치고, 3시간 동안 차를 타고 항저우로 이동하여 송성가무쇼를 감상하였다.
송성가무쇼는 송나라의 역사를 쇼 형식으로 구성한 것으로, 춤, 노래, 서커스 등이 혼합된 종합 무대이다. 아무래도 항저우가 남송의 수도 였기에 이런 쇼가 항저우에서 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송성가무쇼는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으며 훌륭한 쇼였다고 생각한다.
패키지로 갔기에 한 사람 당 가격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글을 쓰기 위해 웹서핑을 하는 중 자료를 찾아 보니, 한 사람 당 한국 돈으로 9000원 정도의 가격이라고 하더라.

이 쇼의 구성은 먼저 중국에 전해져 오는 전설, 그리고 송나라 황제의 생일, 남송의 비운의 명장, 악비의 이야기, 그리고 테마 - 세계는 하나다(그래봤자 아시아 국가들) 로 되어있었다.


중국 전설 부분은 신비로움을 더하기 위한 다채로운 조명 기술과 무대효과를 보여줬는데, 입체적인 이 기술은 중국을 현대적 부분에서는 무시해왔던 나로써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송 황제의 생일 편에서는 비록 진짜 송 황제의 생일 보다는 화려하지 못하였겠지만, 엄청 난 크기의 화려함이었으며, 당시 송이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각 국 축하 사절도 나온다. (페르시아, 인도, 한국 등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살짝 기분이 나빴던 것이, 고려는 조선과 달리 사대주의의 길을 걷지 않았었다. (이자겸 이후 부터는 금에 대해 사대관계를 맺었었으나, 이는 엄연히 금나라가 성립된 후의 이야기고, 송이 번영하였을 때는 금은 일개 북방 민족에 불과했었다. 또한 요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송은 고려와 동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쇼에는 상대적으로 외국인이 많이 오게 되는 데, 외국인들이 이런 것을 보고 마치 한국이 오래 전 부터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지 걱정된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도 이러한 태도의 증거로, 한국을 중화 문명에 넣은 것이 나온다)


제 3장은 악비 장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악비 장군은 김동조 씨의 '묵향'이나 김용의 사조삼부곡의 팬이라면 누구나 간략하게는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금에게 강북이 넘어간 후, 금에 맞서 다시 싸운 송의 용장이었으나, 간신 진회의 꾀임에 넘어가 누명을 쓰고 죽은 비운의 명장이다. ( 사조영웅전에서 보면, 남송 고종이 황제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진회를 시켜 악비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무쇼에서의 악비 장군의 이야기는 금군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비록 작은 무대 였기에 그렇게 큰 장면을 묘사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무대에 비해 많은 인원으로 전투씬을 만들어 냈다는 점과 액션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액션 부분을 보고는 그것을 보니 무협 드라마/영화 에서의 액션이 별로 놀랄 만한 거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은 테마 - 세계는 하나다 로써, 세계 각국의 전통 음악과 안무를 보여주는 무대로(말이 세계지 아시아 일부국이다), 가장 마지막 부분에 한국이 나온다.
 이 부분을 보고서는, 송 황제의 생일 부분과 동일한 불쾌함을 느꼈다. 아리랑이 나왔고, 사물놀이가 나왔는데, 아리랑의 연주 방식이 한국의 연주 방식과는 차이점이 있고, 중국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 느껴졌다. 이 부분에서 갑자기 나는 '동북공정'을 떠올렸다. 동북공정은 간단하게 말해 중국이 역사 왜곡을 통해 동북아 민족들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프로젝트이다. 이 부분을 보고는, 이렇게 의도적으로 한국의 전통을 중국적으로 바꾸어, 한국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에 흡수시키려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가무쇼에서 마음에 안들었던 부분은 하나이다. 바로 관객들의 관람 태도. 패키지 상품으로 많이 오기 때문일까, 보는 사람의 절반 정도가 한국인 패키지 팀이었는데, 여기에서 동아시아 관객들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바로 관람에 집중하지 않고 계속 사진을 찍어댄다는 것. 물론 사진을 찍을 수는 있으나, 그렇게 대놓고 뒤의 사람의 시야를 방해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은 정말 시민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무식한 행동이다. 이들의 해외여행은 '관광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 찍기 위해' 여행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 게 하였다.
(참고로 나는 관광하기 위해 여행한다는 정신에 입각해 최소한 사진을 적게 찍었다)

[ Happening ]
송성가무쇼가 마친 뒤, 일행이 나가려고 하였으나 나가지 못했다. 이유인즉 스콜 같은 비가 쏟아 진 것이었다. 우리는 일단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빗줄기가 약해졌는데, 땅이 물에 잠겨버려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송성 안에는 공연을 마치고 에어 컨디셔너를 꺼버린 탓에 여느 강남의 기후가 되어 있었기에 매우 찝찝하고 불쾌한 상태였다. 일행은 가이드가 우비(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냥 비닐)를 구해올 동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가이드가 우비를 구해오게 되었고 우린 그것을 입고 물에 잠겨 버린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 신발은 벗어 한쪽에 들고)

어찌 보면 무지 짜증날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패키지에서 이런 해프닝이 발생했다는 점, 스스로는 재밌다고도 느꼈다.


악비 [, 1103~1141] 
붕거(). 농민 출신이지만 금()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응모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남송 때가 되자 무한()과 양양()을 거점으로 후베이[]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이라는 정병()으로, 유광세()·한세충()·장준()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군()의 침공을 화이허강[], 친링[] 선상()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중앙에서는 재상인 진회()가 화평론()을 주장함으로써 주전파()인 군벌이나 이상파()의 관료들과 분쟁 중이었으나 1141년,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 그들의 군대를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중앙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의 영웅으로 악왕묘()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와 함께 무묘()에 합사()되었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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