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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강릉] 불행의 문장가들, 허균,허난설헌기념관

그의 한국발자취/강원

by 그라나도 2012. 9. 19.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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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에서 가까운 곳에 기념관이 있기 때문에 자세히 길은 모르지만 대강 여기겠다 싶은 곳을 찾아 정처없이 걸어갔다.

맞는 지 확신도 없이 그저 걸어가기만 했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도로가 바로 이 난설헌로.

이 난설헌로에 기념관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제 다 도착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 도로의 이름을 가질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모두 해보았다.




경포 해수욕장에 수십 분을 앉아 있으면서 구름이 많아 푸른 하늘이 꽤나 가려지기는 했지만

어느샌가 구름은 거의 다 걷히고 저런 파란 하늘을 드러냈다.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




기념관과 이 주변 지역은 아직도 정비중인 지역이었다. 곳곳이 아직 공사중이었다.

허난설헌 생가 역시 안에 별다른 특이한 건물은 없었다. 안에서 차를 즐기고 있는 분들이 있었는데

여기 주인인 후손분들인가? 아님 문화재 관계자 분들인가 생각을 해 보았다.




허난설헌의 영정




복원 중인 생가 구경은 간단히 마치고 기념관으로 갔다.






허초희(본명)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 허씨 집안의 내력인 것 처럼,

문학 쪽으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시인이었으나 남존여비의 유학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꽃피우지 못한 비운의 시인.

황진이 같은 기생이 아니라 자유롭게 글솜씨를 뽐낼수도, 이이라는 유학자를 길러낸 어머니로서의 문학가인 신사임당과도 같을 수 없었다.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글을 배워 그 재능을 뽐냈으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 비극성이 작품의 우수성을 더욱 부각시켰으리라, 그녀는 순수하게 작품만으로 인정을 받는 시인이었고, 그 시들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큰 유행을 이끌었다 한다.





허균(許筠, 1569~1618)

허씨 집안은 강릉에서 알아주는 문장가였다고 한다. 그런 내력 때문이었을까? 오누이가 오늘날까지 나란히 그 문학적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그런 문장에 담긴 이야기들은 그와 그녀의 삶을 늘 불행하게 했다. 

허균은 적서차별에 반대하는 당시로써는 혁신주의자였다. 그런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홍길동전>

하지만 그의 그런 사상들은 당시 기성세력으로부터 매우 배척받았고, 그리고 그는 광해군 당시,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 논란에 휩싸여 목숨을 잃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집안. 그런 급진적 분위기는 분명 당시 조선사회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그런 분위기는 허균과 허난설헌이 평생 동안 불행한 인생을 살게 하였던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그들의 글이 지금까지도 칭송받는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을 받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불후(不朽)의 명성을 가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가 없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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