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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8/서울] 조선 5대 고궁 1. 구한 말 격동하는 역사, 덕수궁(德壽宮)

그의 한국발자취/<조선고궁,왕릉>

by 그라나도 2012. 10. 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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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 역이라는 접근하기 쉬운 역 가까이에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과거 가정법원으로 연결되는 길이라 연인들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문이 있는 덕수궁 돌담길이 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고궁들과는 달리 석조전과 같은 서양풍의 건물이 있기 때문일까? 서울 시내에는 과거 조선 시대의 5개 고궁이 존재하고 있다. 왕이 살았던 곳이 궁인 만큼 궁이라 하면 괜히 엄숙해보이고 뭔가 거대하고 위엄넘치는 건물을 떠올리기 그지 없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우리가 '덕수궁'이라는 장소를 떠올릴 때는 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위엄 넘치는 이미지보다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느낌을 더욱 더 많이 받는다.




덕수궁(德壽宮)

본래 덕수궁은 궁이 아니었다.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아버지인 도원군은 세자였으나 18세에 죽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세자빈 한씨에게 그의 아들 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저택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성종으로 즉위함에 따라 한씨도 대비로 다시 궐에 들어가게 되고 월산대군만 이 집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랬던 저택이 궁이 된 것은 임진왜란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와

이 저택을 정릉동행궁이라 하여 머물렀다고 한다. 그 이후 선조가 죽을 때까지 이 궁에 머물렀다고 하며, 그 사이 궁의 규모를 크게 확장했다고 한다.

광해군 역시 이 행궁에서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611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고 하는데,

이 서궁이 바로 경운궁이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유폐된 인목대비를 뵈러 간 다음, 인조 역시 경운궁에서 즉위했다고 한다.


이후 궁으로써 역할을 하지 못하던 경운궁이 다시 궁으로 사용되게 된 것은 구한 말이 되어서이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태자와 태자비는 경운궁에서 기거하였고, 고종이 환궁을 한 곳이 경운궁으로, 이 곳에서 대한제국이 세워지게 됨으로써,

경운궁은 황제의 정궁이 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순종이 창덕궁으로 가고 고종은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고, 이 때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대한문(大漢門)

원래 이름이 대안문이었던 덕수궁의 정문. 1906년에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원래 덕수궁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쪽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게 되었다.


이미 대한제국이 들어섰을 때인데 왜 한 자가 한나라 한(漢)을 쓰는지 모르겠다.




대한문 안으로 들어서면 쭉 길이 뻗어있다. 이 길을 따라 가다 왼쪽으로 빠지면 함녕전, 덕흥전 쪽으로,

좀 더가면 중화전, 그리고 끝까지가면 석조전으로 갈 수 있다.




함녕전과 덕흥전 방향





함녕전(咸寧殿)

함녕전은 고종의 침소로 1919년 고종이 승하했던 장소이다.




구한 말,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로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던 덕수궁인 만큼, 궁 전체의 느낌은 우리 전통 양식을 하고 있으나,

샹들리에처럼 군데군데에는 서양 양식이 스며들어 있다.





덕홍전(德弘殿)

대한제국이 망한 후 1911년에 세워진 건물로, 고위 관료와 외교 사절을 접견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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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무척이나 특이하게 생긴 구조의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지붕과 기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네의 전통 양식 같아 보이기도 하면서, 

그 지붕의 자세한 구성이라든지 내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서양 건축의 모습을 띄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다.

<가비>라는 영화가 나오고, 1919년 고종 광무제의 붕어가 일제가 커피에 독약을 탔기 때문이라 했을 만큼 고종은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를 좋아하던 고종 광무황제는 이 정관헌에서 커피, 차와 함께 음악을 즐기셨다고 한다.




고종 광무황제께서 차를 즐기셨다고 우리도 다과를 들고 오고 싶지만 여기는 문화유산이라는 거! 들고 올 수는 없다.

서양과 동양의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이 정관헌에서 앞뜰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음악과 마실 것을 함께 즐길 수 있다면 이것도 꽤나 운치 있는 일일 것이다.




궁궐의 중심인 중화전으로 가는 중화문




중화전(中和殿)

1902년, 임시 정전으로 쓰이던 즉조당 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건축해 궁궐의 중심 영역으로 삼았는데, 이 곳이 중화전이다.

중화전은 원래 중층 건물이었는데, 대화재로 불타버린 이후 1906년에 단층으로 규모를 줄여 재건했다고 한다.





구한 말, 서양적인 가치가 들어와 많은 것에서 가치 혼란을 겪지만서도

정전만큼은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 삼도를 설치하는 등, 전통의 격식을 따랐다.





석어당(昔御堂)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즉조당은 공사 중이었고, 선조가 거처하다 붕어한 석어당은 그대로 있었다.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단청을 바르지 않은 소박한 목조 건물이 눈에 띄는데, 이 건물은 현존하는 유일한 목조 2층집이라고 한다.

현재건물은 대화재 때 불탄 후, 1904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석조전

우리나라에 마지막으로 지어진 궁 건물로, 기존의 전통 양식들과는 전혀 다른 서양의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

고종 광무황제가 침전 밑 편전으로 쓰기 위해 축조한 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하여 1910년에 완공했다고 한다.

기단 위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그 위 삼각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고전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해방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덕수궁 미술관

미술관을 방문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보니 들리지는 않았다.




덕수궁을 다 구경하고 쭉 나와 대한문 옆쪽에 있는 연못과 카페

비록 약간 더운 날씨이기는 했지만, 이 야외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연못의 운치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꽤나 들었었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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