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대와 사벌왕릉, 충의사는 많이 떨어져 있다.
3-4km 가량 가야하는데 알다시피 뭐 상주는 차가 없는 지역이고, 시간도 팽팽 남아돈다 싶어 걸어서 사벌왕릉까지 찾아갔다.
전사벌왕릉(傳沙伐王陵)
장축직경 16m, 단축직경 14.5m, 높이 4.5m.
크기만으로 봤을 때는 일반 보통 귀족들의 무덤이라 볼 수 없다. 이 이름 역시 사벌'왕'릉.
사벌왕이라 하면은 진한 12국 중 하나인 사벌국의 왕이라 생각할 수 있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들 박언창의 묘라고 한다.
사벌왕(沙伐王) 박언창
혼란스러운 역사로 접어들던 후삼국시대, 신라는 그동안의 김씨 왕가가 아닌 박씨 왕가에게로 다시 왕권이 돌아와 있었고,
박씨 왕 중 한명으로 제 54대 경명왕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박언창을 917년, 사벌군(沙伐君)으로 책봉하여 식읍으로 사벌주 지역을 하사하였다.
후삼국 동란기에 박언창은 사벌주 지역을 사벌국이라 하여 독자국가를 이루었고, 이 곳에 뭍혔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쭉 황폐화된 채 돌보아지지 않다가 조선 현종 때 국가에서 수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시기 후삼국시대.
수많은 군소세력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가지고 일어났다가 수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중 우리들에게 남게 된 것은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태봉 정도?
그 외의 많은 세력들은 반란, 또는 지방의 강력한 호족으로 남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박헌창은 그 이후에도 '왕'으로 불리우며 미약하게나마 존재감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그 시대의 중심이었던 사벌주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현재 경상도라는 명칭은 경주와 상주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에 상주의 영향력이 컸다는 점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조선시대 감영이 있는 곳이기까지 했고.
후삼국이 성립된 후, 신라의 영역은 지금의 경상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상도의 두 축이 되는 지역이 금성(경주)와 사벌주(상주)였던 것이라고 본다면은,
후삼국 신라의 두 개의 축 중에 하나가 따로 떨어져 나갔다면, 신라에도 큰 타격이지만 반대로 사벌주 지역의 세력은 생각외로 강한 힘을 지닌 지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벌국의 이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왕'의 칭호로 불리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후삼국 또하나의 왕이라는 것이다.
상주 화달리 3층석탑
통일신라 전형의 석탑으로 9세기 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분명 전체 역사의 프레임에서 본다면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벌주라는 지역은 통일신라 9주 중 상주의 중심이었고, 후삼국 신라의 중요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런 사벌주 지역을 가지고 왕을 자칭했던 박헌창.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강력한 힘은 아니겠지만, 이런 역사 속 또 하나의 왕이
고려라는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데 어느정도 작용을 했던 것은 아닐까?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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