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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8/대구] 한국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 온 역사,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그의 한국발자취/대구,경북

by 그라나도 2012. 9. 10.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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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구한 말 아래로부터 시작된 여러 구국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 이전에는 동학농민운동부터 시작해서 만민공동회, 일제시대의 3.1 만세운동까지가 그것들이며,

대구에서 가게 된 국채보상운동 역시 그러하다.





국채보상운동의 역사는 1907년으로 올라간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맺은 일본은 한국에 사회간접자본을 발달하란 미명 아래에 1300만 원을 빌려준다.

이 채권은 금리가 6%의 고금리이며, 집행권 역시 통감부에 있어

사실상 이 돈은 일본의 강제 지배를 위한 시설을 확충하는 데 이용되었고, 엄청난 국채를 떠맏게 된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국채 1300만 원에 의해 우리나라가 일본에 예속될 수도 있다는 위험에 사회 곳곳에서는 국민들이 나서서 국채를 갚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런 운동의 선구지가 된 곳이 바로 대구 지역이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문회의 이름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했고, 자신이 먼저 100원을 내 놓았다.

그 자리에서 또한 김광제는 담뱃대와 담배쌈지를 없애고 담배 값 60전과 의연금 10원을 냈으며 이에 감동한 청중들의 기부로 그 자리에서 2000원이 모금되었다.


이어 서상돈과 김광제는 국채 1,300만원 보상취지 라는 취지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데 있어서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경향신문, 대한민보 등 당시 언론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고 1907년 2월에는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어 전국의 국채보상운동을 조직, 연락하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미담을 신문을 통해 알렸다. 4월에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국채보상운동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국채보상 임시 사무소를 설립하고 

전국의 국채보상운동을 진두지휘하여 국채보상운동이 널리퍼지는데 더욱 큰 작용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의의가 큰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모인 모금이라는 점에서다.

돈 많은 부호들은 참여가 적었던 반면, 부랑자, 노비, 시장상인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모금의 열풍이 불었고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 민중의 의지를 보였던 큰 사건이기 때문이다.




의연금을 탈취하려 했으나 국채보상의연금인 것을 알고, 잘못을 뉘우치고

돈을 기부한 도적떼 이야기.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팔천 중 하나로 분리되었던 기생의 의연금 기부




이런 보통 사람들의 의연금 열풍에 고종 광무황제 역시 감동하여 담배를 끊고 의연금 모금에 나서셨다고 한다.

1907년 2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 금연을 선언하였고, 3월 7일자 기사에서는 영친왕의 길례도 연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황실의 움직임은 기부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양반 계층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국채보상운동을 만만히 보았던 일제는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자

일진회 같은 어용단체를 이용하여 보상운동을 방해했고, 언론 활동을 규제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의 핵심단체인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했다.

또한 양기탁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였다고 조작하여 기세를 꺾고자 했다. 결국 무죄판결이 나기는 했지만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의구심이 커져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좌절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으로 모인 의연금은 약 20만 원 정도인데, 이 돈은 국권을 빼앗긴 이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이 돈 모두가 경무총감부에 소속되어 일제에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뜻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 때 남은 소규모의 자금 등은 20년대의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을 보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지배층이 어떻든, 어떻게 자신들의 안위만 노리든 간에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데 대한민국의 역사에 있어서도 굴곡은 많았다. 훌륭하기도 했지만 늘 지도자들은 결함이 있었고

그런 지도자들을 걱정하며 우리는 나라를 걱정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어떻든 우리나라는 발전하는 나라였다.

그것은 지도자 개개인들이 중요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국민 하나하나의 힘이 우리나라를 지탱해오는 큰 힘이기 때문이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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