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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3/제천] 순교인가 반역인가? 배론 성지

그의 한국발자취/대전,충북,충남

by 그라나도 2012. 8. 22.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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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상으로는 충청북도 제천에 속하고,

천주교 교구상으로는 원주교구에 속하는 배론 성지.

나 역시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조선 근대사에서도 중요한 천주교이기 때문에 들르게 되었다.




과거 이곳이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었을까?

그렇지 않겠지만 지금은 많은 신자를 받는 천주교의 성지이자

아름다운 곳으로 거듭나 있다.




성지와 같은 성당에 가면 있는 촛불봉헌




이 배론 성지가 생기게 된 연유에는 두 명의 인물이 관계되어 있다.

백서 사건의 중심, 황사영과 최양업 신부.

시대순서로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먼저이지만 그 전에 산 위에 있는 최양업 신부의 묘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는 십자가의 길이 꾸며져 있다.

십자가의 길은 성당에 가면 양 벽면에 새겨져 있는 부조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골고타 언덕에 올라가 처형당하는 복음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맨 위에 올라가면 있는 최양업 신부의 묘소.


최양업 토마스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어 두번째로 사제가 된 신부님으로 

부친이 서자 최경환 프란치스코, 모친이 순교자 이성례이다.

1836년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가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4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귀국 후 12년 동안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지역을 방문해 사목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사목 활동을 하면서도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11월경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당시 성 요셉 신학교가 있던 이 곳에 묻히게 되었다.




성 요셉 신학교 복원

신학교라고 해서 서양풍의 건물을 기대한 건 나뿐일까? 사실 성 요셉 신학교의 모습은

초라한 초가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831년 설정된 조선 교구는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신학생들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내 신학교육을 받게했다. 하지만 이것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랐는데,

그래서 이 땅에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두되었고, 결국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신학교가 세워졌다. 1855년 2월이었다.

18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성 요셉 신학교로 명명되었다.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에 의해 성직자 양성이 이루어질 무렵,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황사영 토굴.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곳




1801년에 시작된 신유박해를 피하기 위해 황사영은 이곳에 몸을 숨겼다.

신분은 감추고 부모의 상을 당한 이씨라고 하며 신자 김기동 집 뒤에 있는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 은신했다.

황사영은 이곳에서 백서(帛書)를 썼는데, 비단 위에 써서 백서라 불리운다. (사진에 나와 있는 것이 백서의 복제본)


백서에는 신유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순교 사실을 담고 있고,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5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1. 박해로 피폐된 조선 교구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

2. 북경 교회와 조선 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중국 청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던가 연락처를 설립할 것을 요청

3. 교황이 청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게 할 것을 요청

4. 청 황제에게 말해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키고 친왕이 조선을 보호 감독하게 하고 조선왕을 부마로 삼도록 할 것을 요청

5. 서양의 군사가 조선에 출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사가 받아들여지도록 할 것을 요청


이 백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지기 이전에 그가 체포되었고 백서도 압수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천주교에서는 순교로 보는지 뭘로 보는 지 모르겠지만,

천주교인이기 전에 한국국민이자 한민족의 일원으로 이 사건을 성지라는 곳에서 크게 알리고 있을 만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론 성지가 성지인 이유가 성요셉신학교와 최양업신부 때문이 아니고 황사영 백서 때문이라면

굉장히 한국 교구에 실망할 것 같다.


물론 조선에서 그동안 천주교 박해가 많이 일어난 것은 물론이고, 천주교 입장에선 그 과정에서 희생당한 사람을 기리는 것은 맞는 행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라를 중국에 팔아먹으려고 한 매국노를 기리는 게 말이나 될까?

단지 천주교가 개입되어 있을 뿐, 행동만 보자면 을사5적들이 한 짓이나 원간섭기에 기씨 가문이 하는 짓이나 다를게 뭐가 있을까?

비록 내가 천주교인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서 이 행동을 막 기리다시피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원주교구 배론성당의 모습. 사실 실제로 쓰이는 대성당은 따로 있지만,

과거 조선시대의 성당의 모습을 구현하기 위한 성당이 아닐까 싶다. 기와집 안에

소박한 규모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최양업 신부의 일생을 그린 벽화.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와 천주교에 대한 논쟁은 많다.

근대기 서구 열강들이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기 위한 흔한 방법이

기독교를 전파시켜 자신들에 대한 위화감을 없애기 위함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천주교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병인양요의 계기를 주기도 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민감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는 우리 역사에 있어 천주교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겠지만, 그리고 선종한 최양업 신부님같은 분들을 교육시킨게 다 침략을 위해서라 이야기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를 믿은 사람들은 그런 침략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종교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일테다. 천주교, 기독교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를 이용했었던 서구 열강들이 잘못이었고, 종교에 의해 조국을 팔아먹으려고 한 황사영같은 인물들이 잘못되었던 것일 뿐.


종교와 정치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잘못을 천주교에게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기독교를 박해한 유럽이 오늘날은 기독교를 주 종교로 믿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순교자'가 아닌 '매국노'이자 '반역자'인 황사영 같은 인물을 천주교에서 옹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구'라면.





Canon - Ixus 310 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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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JAE 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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