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2.07.08/동경성] 해동성국은 어디로 가고....발해상경용천부터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8. 3. 16:57

본문



경박호에서 동경성으로 돌아온 뒤, 삼륜택시를 잡아 발해 상경용천부터로 갔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발해진'이라는 곳은 동경성에 속해 있는지, 아니면 동경성 옆에 있는 지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동경성에서 택시로 5-10분 정도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중국에서 상경용천부터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는 표식.

그러나 국가문화유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다.




상경용천부는 우리 민족 국가 중 마지막으로 만주 지역을 경영했던 국가인 발해(서기 698년 - 서기 926년)의 수도였던 곳이다.

발해 고왕 대조영이 동모산(현재 돈화 부근 육정산)에서 발해를 건국함으로 발해가 세워진 뒤,

제 3대 문왕대 협소한 동모산을 벗어나 주변에 중경현덕부를 수도로 건설했다. 

그러다 곧 755년 무렵 상경용천부로 천도를 하게 되었다. 785년 잠시 동경용원부로 천도를 하였으나 794년 5대 성왕 대화여에 의해

다시 상경용천부를 수도로 삼아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 지역에 동단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웠는데, 상경용천부를 천복성이라 이름을 바꾸고 지배했었다.

그러나 곧 동단국의 수도가 요양으로 옮겨진 뒤 폐허가 되었고,

1933-1934년 일본 도아고고학회에 의해 다시 역사의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상경용천부터 입구

우리민족의 성을 쌓는 방식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끼워쌓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거를 무자비하게 회칠해놓은 것이 매우 아쉽다.


상경용천부는 전성기에 100만의 인구가 살았던 대도시이다. 이런 대도시인만큼, 실제 상경용천부터를 발굴하려고 하면 매우 엄청난 규모라 다 발굴은 하지 못하고 현재 발해궁 터만 발굴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은 궁의 입구




외성 기둥이 있던 자리





문을 들어가면 있는 첫 궁터의 서편





궁성의 첫번째 전 터




첫번째 터를 넘어간 뒤에 있는 보상화무늬의 부조가 있는 계단.

보상화무늬는 중심에 연꽃 문양이 있고 그 주위에 연화당초무늬를 새긴 형태로 

단순하면서도 굵은 선을 살린 소박한 무늬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전통 양식으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복원을 해놓는데 현무암으로 벽돌형태를 만들어 성을 쌓았다.

이런 형태는 우리 민족의 전통 성곽을 쌓는 방법이 아니라 당나라 장안성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다.

상경용천부가 당나라 장안을 본 떠 만든 계획도시임은 맞지만 외성이나 궁성1전터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상경용천부의 궁은 우리나라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성이 맞는데 말이다.




이렇게 과거에는 성을 지었음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방식으로 복원을 한 저의는 아마 동북공정의 일환이었으리라.







이렇게 몇 개의 전각 터가 발굴되어있었고 뒤쪽에는 아직도 발굴 진행중이었다.

발굴 진행중인데서 사진찍다가 잡히면 걍 메모리 다지워버린다는 무서운 이야기 때문에

그냥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5번째 전각 터까지 오는데도 한참을 걸어왔다.

궁성의 규모만 이정도임을 보면 과연 100만 인구의 대도시(당시 100만인구인데는 장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앙코르 정도 밖에 없었을텐데 말이다) 상경용천부임을 알 수 있다. 북방민족임에도 이정도의 도시규모, 궁성규모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왜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렸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이런 발해가 당의 제후국에 불구했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쇼일 뿐

그렇지만 늘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잘지켜야 할 것!이라고 이제는 풀 뿐인 상경용천부터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Canon - Ixus 310 hs

ⓒ2012 Granado
LEE JAE YONG

All Rights Reserved


(구글맵스를 이용했습니다. 문제시 연락주시면 삭제하겠습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