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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6/장춘] 슬픈 꼭두각시 놀음의 현장, 위만주국황궁(上)

그의 해외발자취/[2012] 만주

by 그라나도 2012. 7. 2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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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역에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이동한 곳은 위만주국황궁이다.

과거 일제시대 만주 지역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황궁이 있었던 곳.


만주국은 1932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때까지 현 내몽골 일부와 동북3성 지역에 존재했던 일제의 괴뢰국가이다.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뤼순, 대련 지역을 러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를 거둔 뒤 할양받게 되었는데,

그 이후 이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라고 불렀다.


이 관동주에는 일제가 식민행정기관인 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 주둔군인 관동군을 설치하게 된다.


이 관동군이 남만주 열차 폭발 사건을 봉천 군벌의 소행이라 하고 무단으로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만주 사변이다.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의 연합으로 만주 지역은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다. 국제 연맹에서는 만주에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도 이전에 일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워 현재의 장춘을 신경(新京)이라 하고 대동(大同)이라는 연호를 쓰는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1934년 제정을 수립하고 연호를 강덕()이라고 바꾸었다.


만주국은 표면상으로는 미국을 모델로 아시아에 만든 국민 국가로

만주족, 한족, 몽골인, 조선인, 일본인의 오족협화()를 표방한 국가였으나 실상은 일본의 식민 국가였다.

국제연맹에서 보낸 리튼 조사단은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며 주권은 중화민국에 있다는 중화민국의 주장을 받아들여 돌려줄 것을 이야기하였으나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만주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국가였으나 실질적인 통치는 관동군 사령관에 의해 장악되었다. 또한 경제 역시 일본인의 만철(滿鐵)이 전 철도를 운영하였고 닛산 콘체른이 진출하여 개발 사업을 독점하였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만주국의 역사는 가장 치욕적인 역사이며 있어서는 안되었을 역사라 하여

만주국을 일컫어 거짓 위(僞)자를 붙여 위만주국이라고 부른다.


만주국이 만주 지역에 존재했을 당시, 황제였던 푸이가 꼭두각시 지배자 노릇을 했던 황궁이 바로 이 위만주국황궁.


입장료는 80위안이지만 학생의 경우에는 30위안 할인받을 수 있다.





위만주국황궁의 지도




경마장을 돌아서 황궁 입구로 들어갔다.





궁내부 건물.

뻉 둘러쌓여서 방이 있고 중간에 공터가 있는 구조가 심양의 장씨수부와 비슷하다.

만주국의 궁내부는 황제의 직속 기관으로 집정 시대에는 집정부라고 불리었다.

국무원으로부터 독립되어 궁 안의 일을 관할하는 부서




궁내부 대신들의 회의실. 그러나 실제로는 회의라기 보다는 일본에 의해 명령 하달을 받았다고 보는 게 옳다.




창춘헌(暢春軒)

처음엔 푸이의 누이들이, 그 뒤엔 그의 아버지 순친왕 짜이펑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푸이의 측실 중 한 명이었던 탄위링이 살았다고 한다.




창춘헌 앞의 작은 정원




식수헌(植秀軒)

초기에 푸이가 쉬는 곳으로 만들어졌다.

후에 푸이의 두번째 여동생이 결혼한 이후에는 그 부부가 살았고,

동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푸이의 돈과 보석 등이 보관되었다고 한다.

동덕전이 건립된 이후에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본관? 쪽으로 들어와 측면에 있는 방에는 만주국 시절 여러가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은 당시 열차





만주국 군대

만주국에도 군대가 있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독자적 군사 능력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일본군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집희루(緝凞樓)

1900년대 초기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길림-흑룡강 대외 교통국(?)건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32년 푸이가 이 곳의 이름을 집희루로 바꾸고 본관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주국 시기 동안 푸이, 황후인 완용(완룽), 측실인 탄위링과 살았다고 한다.




일본이 일으켰던 9.18 만주사변을 잊지 말자는 내용.

중화 사상에 젖어있는 중국인들에게 왜(倭)라 부르며 가장 하급 오랑캐로 여겼던

일본에게 침략을 당했던 역사는 가장 치욕적인 역사로 기억된다.







1937년 푸이와 결혼한 상귀인(祥貴人) 탄위링의 방.

만주기인 출신으로 타타라씨이다. 1942년 사망했는데,

푸이는 스스로가 그녀를 일생동안 가장 사랑했다고 말했으며 

반일감정으로 투철한 그녀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사망했다고 여겼다.

전후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도 그렇게 증명했다고 한다.





접견실에서 일본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푸이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형상.




1922년에 푸이와 결혼했던 황후 완용(완룽)이 아편을 하는 모습.

효각민황후라는 시호를 가지고 있는 완용은 1922년 푸이와 결혼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모습에서는 그녀가 푸이의 뜻을 존중하고 그와 함께하는

똑똑한 여성이나 억압받는 현실과 그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아편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푸이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고

푸이에 반발해 아편을 하고 간통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아편 중독자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푸이가 히로히토 일왕의

초대를 받아 일본을 두 차례 방문할 때도 한 번도 대동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일본인 장교와 내통에 사생아를 낳자 푸이가 그 아기를 아궁이에 던져 버렸다고도 한다.

그녀는 일본이 패망하고 1946년 길림성의 감옥에서 죽었는데, 그 때까지 그 아이가 죽은 지 모르고

자신의 오빠가 키우는 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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